오늘의 말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로마서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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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알베르 카뮈의 단편집 『유배와 왕국(일본어역 『追放と王国』을 읽고 쓴 글)』에 수록된 단편 〈침묵하는 사람들「啞者(もの言わぬ人々)」〉에는 20일동안이나 파업을 벌였지만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일터로 돌아온 목제 저장통을 제작하고 수리하는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평생을 바쳐 익혀온 기술과 흘린 땀을 정당하게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나 경영주 라살은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노동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생계를 위해 다시 작업장으로 향해야 했다. 출근하자 평소에는 활짝 열류 있던 작업장의 커다란 문이 닫혀 있었다. 그들에게 가장 아픈 것은 임금을 더 올리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자신들의 수고와 인간적 존엄이 처참히 무시당했다는 상처였다.
노동자들은 라살에게 ‘침묵’으로 대응하기로 한다. 생계를 위해 일을 거부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마음까지 그에게 굴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망치와 톱 소리가 가득한 작업장에서의 조용한 침묵은, 억울한 마음을 아무리 외쳐도 통하지 않는 힘센 자 앞에서 더는 어떤 말도 섞고 싶지 않다는 그들의 무언의 저항이었다.
주인공 이바르는 마흔 살의 숙련 노동자로 평생을 바쳐 익힌 기술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점점 필요가 없어진다는 상실감에 가득하다. 그는 불편한 다리를 한쪽 페달에 고정하고 다른 다리로 힘겹게 페달을 밟으며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고, 좋아하는 육류가 없는 도시락을 먹으며 가족을 부양한다. 그는 자신의 처지도 어려우면서 빵도 무화가 몇 개로 허기를 채운 아랍인 동료 사이드에게 빵을 나누어 준다. 그는 동료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여전히 사랑으로 손을 내미는 따뜻한 사람이다.
작업이 계속 되는 오후, 라살의 어린 딸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구급차에 실려 간다. 자신들의 분노와는 전혀 관계없는 어린아이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현실 앞에서, 걱정이 앞선다. 라살은 자신들을 모욕한 경영주였지만, 지금은 어린 딸의 생명을 걱정하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가엾은 아버지이기도 했다.
끝날 시간이 되자 노동자들은 몸을 씻고 옷을 갈아 입는다. 평소 같으면 농담과 웃음소리가 넘쳤겠으나, 오늘은 모두가 침묵한다. 작업장에 들어온 라살이 힘겹게 작별인사를 건네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는다. 이바르는 아이의 상태가 어떤지 묻고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지 못했다. 라살이 떠난 뒤에야 자신 안에 있는 연민을 깨닫지만, 정작 그 마음을 표현할 순간을 놓쳤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장면이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까닭은, 노동자들이 결코 냉혹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배고픈 동료에게 먹을 것을 나눌 줄 알았고, 비록 자신들을 모욕한 경영주 였지만 그의 자녀를 걱정하였다. 다만 자신들이 입은 상처가 너무 컷기에, 상대방의 아픔을 향해 다가가지 못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존엄을 지키기 위한 방패의 침묵이었지만, 어느새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도 입을 닫게 만드는 벽이 된 것이다.
특히 이바르가 침묵을 깨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라살에게 위로를 건넨다면, 함께 굴욕을 견뎌온 동료들에게는 배신의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상대방이 겪고 있는 고통을 위로한다고 해서, 부당한 잘못이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부당한 대우에 맞서 당당히 권리를 요구하면서도, 상대가 아픔과 고통을 겪고 있다면 염려하고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어야 한다. 긍휼을 베푸는 일이, 정의를 부르짖는 열심 때문에 무시되거나 경시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우리도 억울한 일을 겪으면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글 때가 있다. 상대가 내게 먼저 찾아와 무릎 꿇고 사과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상대가 내 고통을 알아주기 전에는 나도 그 사람의 고통을 보아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정의를 위해 힘쓰면서도 사랑해야 할 기회를 놓친다. 상대의 아픔을 긍휼히 여긴다고 정의가 부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위로의 말을 건넨다고 부당한 대우가 용인되는 것도 아니다. 상대의 잘못과, 그가 겪는 고통을 구분하여 바라보는 것이야 말로 메마른 세상속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참된 사랑의 지혜이다.
물론 해묵은 갈등이 한 마디의 위로의 말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깊은 상처에는 가해자의 잘못에 대한 인정과 책임 있는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상대가 변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의 마음을 분노와 미움으로 채울 필요는 없다. 사랑은 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을 미움의 감옥 속에 가두지 않는 것이다.
죽음을 이기실 능력이 있는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 옳고 그름을 떠나, 슬퍼하는 사람들의 곁에 서서 그들의 찢어진 마음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조차 자신을 조롱하고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 사랑을 나타내셨다. 복음은 상처받은 사람은 어떤 일에나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사랑과 진실을 말할 용기를 품고, 동시에 고통받는 사람의 눈물을 바라볼 긍휼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이바르는 라사르의 딸에 대한 걱정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기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본 바다를 아침처럼 온전히 즐기지 못한다. 집에 도착하자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은 책을 읽고, 아내 페르낭드는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묻는다. 처음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몸을 씻은 뒤 집의 테라스에 앉아 아내의 손을 잡고 그날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 한다.
라살과의 관계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고, 지나간 순간도 되돌릴 수도 없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이 완전히 닫혀 버린 것은 아님을 넌지시 암시하며 소설은 막을 내린다.
우리도 지금 다시 시작해야 한다. 오래 품은 억울함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잘못된 것은 바로잡되 상대의 고통까지 외면하지는 말자. 용기를 내어 진실을 말하고, 상대가 고통 가운데 있다면 통쾌해 하며 손뼉을 치는 것이 아니라 진심 어린 위로를 전하자. 주님이 우리에게 아무 조건 없이 먼저 다가오셨듯, 우리도 침묵의 벽을 넘어 사랑의 손을 내밀려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
오늘의 실천
오늘 하루, 내가 서운함과 억울함 때문에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외면해 온 사람이 있는지 돌아보겠습니다. 상대방의 잘못은 잘못대로 분명히 하되, 그 사람이 겪는 고통까지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위로가 필요한 이에게 먼저 안부를 묻고, 사과해야 할 사람에게는 변명 없는 사과를 하겠습니다. 갈등을 무작정 덮으려고만 하지 않고, 정직한 대화와 열린 마음으로 굳어진 장벽을 허물어 가겠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베푸신 긍휼을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전하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제가 받은 상처와 억울함에 사로잡혀, 정작 상대방의 눈물까지 외면했던 완고한 마음을 회개합니다. 저의 아픔과 억울함을 모두 아시는 주님께서, 저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의 아픔도 사랑으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소서. 정의를 포기하지 않되 사랑을 잃지 않게 하시고, 자존심 때문에 위로와 화해의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하소서. 저를 먼저 사랑하신 십자가의 은혜로 굳어진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오늘은 침묵이라는 차가운 장벽으로 상처를 더하기보다, 따뜻한 말과 진실한 행동으로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