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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28일 묵상

오늘의 말씀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시편 139: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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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알베르 카뮈의 소설 『전락(일본어 역『転落』을 읽고 쓴글)』의 주인공 장바티스트 클라망스는 자신을 누구보다 바르고 너그러운 사람이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파리에서 변호사로 일하며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도움이 필요하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망설임 없이 친절을 베풀었다. 그에게 선행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사람들의 존경도 당연한 보상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그 친절과 선행도 자신의 안전과 안락함이 위협받는 결정적 순간에는 뜻밖에도 힘을 잃는다.

어느 밤, 센강의 다리를 건너던 그는 난간에 선 젊은 여자를 지나치게 된다. 잠시 후 강물로 몸을 던지는 첨벙하는 소리와 비명이 들린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지만, 그는 발걸음을 돌리지도, 도움을 위해 누군가를 부르지도 않는다. 차가운 강물에 뛰어들었다가 처할 위험이 두려워 아무 행동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집으로 돌아온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법정에서는 약자의 편에 서 정의를 외치던 사람이, 정작 아마도 보는 이 없을 때는 도움이 절실한 이웃의 외침에 등을 돌린 것이다. 그 여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 것이 두려워 며칠 동안 신문을 읽지도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북아프리카의 수용소에 갇혔을 때의 이야기는 그의 민 낯을 더 확실히 드러낸다. 동료 수감자들이 종교적인 지도자 역할을 할 사람을 뽑았을 때, 클라망스가 일종의 ‘교황’역할을 맡게 되었다. 극심한 갈증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죽어 가는 동료에게 돌아갈 물을, 몰래 자신이 마셨다. “어차피 죽을 사람보다 모두를 이끌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당연한 행동”이라고 비겁하게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남을 도우며 산다고 자부했지만, 자신의 생명이 벼랑 끝에 몰리자 남의 몫을 빼앗은 것이다. 이렇게 클라망스는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는 순간에는 자신이 평소 주장했던 높은 도덕적 이상을 지키지 못한다.

이 소설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는, 클라망스가 악랄한 위선자여서가 아니다. 우리 역시 그와 비슷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손해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한 없이 너그럽지만, 시간과 돈, 체면과 내 위치가 걸리면 쉽게 달라진다. 도움이 필요함을 알지만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외면하고, 잘못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에는 그럴싸한 핑계를 찾아내고, 잘못을 인정해야 할 순간에는 책임을 전가할 상황이나 사람부터 찾는다. 평소에 입에 담았던 사랑과 정직이,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는 얼마나 연약한지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큰 시험은 그 사람의 인격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고 생각하지만, 진실된 인격은 “지켜보는 사람이 없어도 규칙을 잘 지키는가, 내게 손해가 되어도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돕는가, 은밀한 일에도 정직한가”에서 드러난다. 훌륭한 신념을 갖는 것과 실제로 그 신념에 따른 행동을 선택하는 것은 다를 수도 있다.

주인공의 이름 '장 바티스트 클라망스(Jean-Baptiste Clamence)'는 그가 만들어 쓰는 가명이다. '장 바티스트'는 성경의 세례 요한을 가리키고, '클라망스'는 광야에서 외치는 사람을 뜻하는 라틴어 표현과 자비와 용서를 뜻하는 프랑스어 '클레망스'와도 비슷하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낮추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며 회개를 선포했지만, 클라망스는 회개를 말하면서도 자신의 죄에서 진정으로 돌아서지 못한다. 그의 이름은 ‘자신의 죄를 아는 것’과 ‘그 죄를 반성하고 돌이키는 것’은 다르며, ‘겸손한 말을 하는 것’과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위선을 인정하지만, 그 고백마저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무기로 사용한다. “나도 죄인이지만 당신도 다르지 않다”는 논리로 다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잘못을 고백하면서도 교묘한 변명으로 자신을 방어하고, 겸손한 말을 하면서도 은근히 인정받기를 바라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그의 모습 안에 담겨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향해 자기 마음을 살펴 달라고 기도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 빛 앞에서는 우리가 내세우는 자랑스러운 공로도, 남몰래 품은 두려움도 감출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을 열어 보이는 이유는, 스스로를 정죄하고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분께서 은혜로 새롭게 빚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하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다고 장담했지만, 막상 위태로운 상황에 빠지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를 실패와 부끄러움 속에 버려두지 않으셨다. 친히 그를 찾아가시어 그를 회복시키시어 그에게 당신의 소중한 양들을 맡기셨다. 주님은 넘어지지 않는 사람만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자신을 인정하고 눈물로 돌이키는 사람들을 회복시키시고 다시 세우신다.

내 선함을 증명할 그럴듯한 증거보다, 손해와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내가 지켜야 할 사람을 떠올려 보자.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고 그동안 외면했던 요구에 다시 고개를 돌리고, 내가 욕심으로 빼앗았던 몫을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람에게 돌려주며, 비겁한 변명 대신 반성과 더불어 사과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의로움을 과시하기 위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나를 붙드시는 그리스도의 자비가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게 하자. 세상에 나를 돋보이게 하려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아니라, 참된 구원을 위해 낮아지는 자가 되자.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언행은 조금씩 일치되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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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실천

오늘 하루, 나의 선한 말과 실제 행동 사이에 차이가 없는지 돌아보겠습니다. 시간과 물질의 손해를 볼까 두려워 외면했던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작은 수고를 아끼지 않고, 내 잘못을 발견하면 변명보다 사과를 먼저 선택하겠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정직을 지키며, 나를 돋보이게 하는 말보다 상대를 살리는 행동으로 주님의 사랑을 전하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저의 은밀한 마음까지 모두 아시는 하나님, 평소에는 사랑과 정의를 말하면서도 안위가 위태로워지면 이웃을 외면했던 이기적이고 비겁한 연약함을 용서하여 주소서. 제 이름과 체면을 지키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세례 요한처럼 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나타내게 하소서. 숨겨 둔 두려움과 이기심을 비추어 주시고, 실패한 베드로를 다시 세우신 은혜로 저도 새롭게 하소서. 오늘은 말을 많이 늘어놓는 사람이 되기보다, 주님의 사랑을 손과 발로 행하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