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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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알베르 카뮈의 희곡 『정의의 사람들』에는 러시아의 억압적인 정치체제를 무너뜨리고 가난한 민중에게 자유와 행복을 되찾아주려는 젊은 혁명가들이 등장한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으려 결의한 그들은 태공(황제의 숙부 세르게이를 말함)을 암살할 거사 계획을 세운다. 폭탄을 던질 임무를 맡은 카리아예브는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두려움도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태공의 마차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차마 폭탄을 던지지 못한다. 마차 안에 탄 두 명의 어린아이와 태공비를 보았기 때문이다.
동료인 스테판은 어린아이 두 명의 희생을 피하려다 장차 수 천의 어린아이들이 굶어 죽을 것이라며 그를 우유부단한 자라 비난한다. 그러나 카리아예브는 무고한 아이들을 죽여가며 만드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이 되겠는가라며, 그런 무자비함은 정의라는 명분으로 포장될 수 없다고 항변한다. 거사의 순간에 멈춰선 그의 망설임은 결코 비겁함의 증거가 아니었다. 도리어 그의 마음 깊은 곳에 타인의 생명을 향한 떨림과 긍휼이 남아 있다는 서글픈 증거처럼 보인다.
물론 그를 비난한 스테판의 분노 뒤에도 아픈 사연이 숨어 있었다. 감옥에서 모욕과 폭력을 겪을 때, 그 곁을 지키던 베라라는 동지가 그에 대한 항의로 자살을 하는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그 상처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 어떤 폭력도 정당하다”는 왜곡된 확신으로 굳어졌다. 내가 고통을 겪었다고 타인이 받는 고통에 절로 너그러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도리어 ‘정의’라는 미명 아래 내가 당했던 상처와 비극을 다른 사람에게 되풀이한다. 그래서 오래된 상처를 치료하는데 필요한 것은 또 다른 분노를 위한 명분이 아니라, 모든 허물을 감싸는 은혜인 것이다.
카리아예브는 다시 찾아온 기회를 살려 폭탄을 던져 태공을 살해하고 현장에서 붙잡힌다. 무고한 어린아이들을 보호했다는 그의 도덕적 인륜도, 태공을 살해한 그를 무고한 사람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태공비가 감옥에 수감된 카리아예브를 찾아와 남편을 잃은 슬픔을 이야기하며, 회개하고 하나님을 받아들인다면 사면을 청하겠다고 제안한다. 그가 단지 ‘정치적 표적’으로 삼았던 태공도, 누군가에게는 대체할 수 없는 사랑하는 남편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의한 행위에 대해 죽음으로 책임을 지겠다며 거절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다고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태공비의 마음 속 깊은 상처가 치유되지는 않는다.
더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카리아예브를 사랑했던 도라의 모습이다. 카리아예브의 처형소식을 들은 그녀는 다음 번 폭탄을 던지는 사람이 되겠다고 나선다. 민중의 행복을 위해 혁명에 투신한 그녀가, 정작 자신은 행복한 내일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사랑과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며 시작된 투쟁이 한 인간이 누려야 할 평범한 삶의 가능성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모습은 깊은 안타까움을 남긴다. 도라는 사랑하는 사람과 평범한 일상을 간절히 바랐지만, 그런 개인적인 행복을 누리는 것조차 억압받는 사람들에게는 죄를 짓는 것처럼 느끼며 자신을 채찍질해야 했다.
우리 곁의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일은, 결코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는 이기심은 아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사람을 따뜻하게 품지 못한다면,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도 한낱 공허한 구호로 전락하기 쉽다. 때로는 위대한 일을 이루는 것보다, 오늘 서로의 곁을 지키는 일이 더 절실하다. 정의라는 구실로 사랑하는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좋은 결과를 이유로 동료의 아픔을 외면하며, 신앙을 바로 세우겠다는 열심으로 누군가를 정죄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 명분이 아무리 정당하다 할지라도, 사랑 없는 정의가 사랑하는 마음보다 앞설 때, 정답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차가운 칼날이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단지 정의만을 요구하지 않는다. 미가 선지자의 고백처럼,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고 가르친다. 정의와 자비는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짝이다. 예수님은 죄의 본질을 미워하셨지만. 죄인들을 단 한번도 함부로 대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의 희생을 발판삼아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려 하지 않으셨고, 도리어 죄인을 살리기 위해 친히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 그 무한한 은혜 앞에서,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옳음으로 자신을 증명하려는 오만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
혹시 날카로운 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아프게 했어도 늦었다고 결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자. 우리의 연약함과 허물을 모두 아시는 주님은, 돌이키고 나아오는 사람을 이미 늦었다고 외면하지 않으신다. 오늘 우리가 지켜내야 할 것은 나 자신의 체면이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내 곁의 한 사람이다. 옳음을 말해야만 할 때조차 상대의 눈물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잘못을 바로잡을 때에도 그 손을 결코 놓지 않는 지혜,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을 배워 가는 사람의 모습이다. 주님의 그 크신 은혜의 길은, 바로 그 겸손한 돌이킴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된다.
오늘의 실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장하느라 정작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겠습니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처지와 아픔을 헤아리겠습니다. “더 좋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명분이기에 작은 상처쯤은 어쩔 수 없다”는 오만한 정당화를 내려놓겠습니다. 특히 가족과 가까운 이웃에게 옳고 그름을 가리기에 앞서 따뜻한 말을 건네고, 나의 조급함과 언행으로 상처를 주었음을 깨달았다면 먼저 사과하겠습니다. 나의 옳음을 증명하려 애쓰기보다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정의와 사랑이 함께하는 삶을 실천하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정의와 사랑의 근원되시는 하나님,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기 확신에 사로잡혀 정작 제 곁에 있는 사람의 아픔을 돌아보지 못했던 이기심을 회개합니다. 올바른 목적이라며 누군가의 희생이나 상처를 당연하게 여겼던 교만한 마음을 용서하여 주소서. 정의를 말할 때에도 긍휼을 잃지 않게 하시고, 잘못을 바로잡을 때에도 상대의 존엄과 마음을 소중히 여기게 하소서. 저의 의로움을 내세우기보다 십자가에서 보여 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의지하게 하시고, 상처받은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겸손과 용기를 허락하여 주소서. 오늘은 저의 말과 행동이 누군가를 판단하고 아프게 하는 도구가 아니라, 상처를 어루만지고 관계를 회복시키는 은혜의 통로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