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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23일 묵상

오늘의 말씀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고린도전서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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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일본어 역 「誰がために鐘は鳴る」를 읽고 쓴글)』는 20세기초, 사상과 이념이 정면으로 충돌한 가장 비극적인 스페인 내전의 산속에서 시작된다. 미국 몬태나대학교에서 스페인어 교수를 하던 로버트 조던은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자 파시즘의 확신을 막는 일이라 여겨 공화파에 가담하고, 적군의 지원병력이 이동할 수 없도록 다리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현지 게릴라부대의 도움을 받고자 산속으로 들어간다. 어떤 게릴라들은 정의를 말하며 찬성을 하는 반면 어떤 이는 살아남기를 바란다.

조던을 안내하던 늙은 대원 안셀모는 농민 출신이다. 그는 다리를 지키는 적군을 바라보면서 “저 병사도 누군가의 아들이고 친구이며, 고향에서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공화파의 대의를 버리지 않지만, 명분을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괴로워한다.

거친 말투와는 달리 사람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는 능력이 있는 여성대원인 필라르가 들려주는 고향 마을의 학살 이야기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어제까지 정을 나누던 이웃들이 하루 아침에 이념의 차이로 ‘적’이 되자 서로에게 폭력을 가하고 심지어 절벽 아래로 내던져 죽인다. 사람의 목숨보다 우리 편이 이겨야 한다는 분노가 이유다. 내 이웃이 누구냐가 아니라 어느 편에 섰느냐로 생사를 결정한다.

또 다른 지도자 엘 소르도와 그의 대원들이 적군에게 포위된다. 내전으로 모든 가족을 잃은 젊은 호아킨은 죽음이 가까워지자 어릴 적 배웠던 기도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는 결국 목숨을 잃는다.

내전이 끝나고 포성이 멎었을 때 남겨진 사람들은 전사자가 몇명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죽음은 그가 품었던 기억과 두려움, 앞으로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을 포함한 그들의 역사가 함께 끊어지는 일이기에 그 죽음은 결코 숫자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념과 정의를 위해 참전하여 작전의 성공만 바라보던 조던도 부모를 잃고 폭력을 겪은 마리아를 사랑하게 되면서 명분과 살생에 대해 갈등을 하게 된다. 그는 내전이 끝나면 마리아와 함께 평범한 날들을 꿈꾸지만, 현실로 돌아온 그는 다리를 폭파한다. 하지만 안셀모가 조던이 설치한 폭약을 터뜨리는 과정에서 날아온 금속 파편에 맞아 숨지고, 조던 자신도 발이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한다. 함께 남겠다는 마리아를 설득하고 적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홀로 남는다. 전사한 게릴라들의 시신에서 머리를 가져오도록 명령했던 적군의 악랄한 장교 베렌도 중위가 가까이 오는 모습을 바라보며 조던이 멀리에서 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소설은 베렌도를 죽였는지, 조던이 죽었는지를 알려주지는 않지만, 마지막 선택 앞에서 한 생명이 다른 생명과 얼마나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작품의 제목은 영국의 시인이자 성공회 성직자였던 존 던의 1624년 묵상문에서 유래했다. 인간은 결코 홀로 떨어져 존재하는 섬이 아니며, 한 사람만의 죽음일지라도 많은 사람과 역사에 얽혀 있기에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고백이다. 험한 일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이 일어나는 오늘 날, 우리는 먼 곳의 전쟁이나 재난 소식을 들으면 안타까워하지는 하지만 너무 쉽게 잊는다. 사망자 수나 피해의 정도는 기억해도 그들의 이름과 역사는 잊고, 때로는 잠시의 분노라는 감정으로 마음을 정리한다. 물론 세상의 모든 아픔을 내가 다 떠안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고통과 눈물을 남의 일이라고 쉽게 밀어내되 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는다”고 말했다. 이 말씀은,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너무 무심해서는 안된다는 믿음의 태도를 가르친다. 예수님이 본을 보이신 이웃 사랑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것이 선악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잘못을 눈감아 주라는 뜻은 분명 아니다. 하지만 악은 분명히 거절하면서도 사람의 생명과 존엄은 끝까지 귀하게 여겨야 함을 말한다.

예수님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울지 말라고 재촉하지 않으셨다. 도리어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는 함께 눈물을 흘리셨다. 십자가에서는 우리의 무거운 죄를 대신 감당하셨으며,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이 마지막이 아님을 선포하셨다.

오늘 우리 가까이에도 누군가를 위하여 울리는 종소리가 있다. 가족을 잃고 침묵하고 있는 사람, 병상에서 외로워 한숨 짖는 사람. 들어주는 이가 없어 한 없이 작아진 목소리다. 세상의 모든 비극을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위로의 말을 전하고, 도움의 손을 건네며, 위험에 놓인 사람의 안전을 위해 솔선하는 행동을 할 수는 있다. 그렇게 할 때 슬픔과 아픔 속에 있는 나도 강한 척하지 않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그 종은 낯선 사람만을 위해 울리지 않는다. 종은 그도 나와 같은 인간이며, 내가 그의 아픔에 응답하도록 부름 받았음을 일깨우며 울린다. 하나님은 한 방울의 눈물과 연약한 돌봄의 손도 헛되게 여기지 않으신다. 오늘 누군가의 슬픔 곁에 내가 잠시라도 머문다면, 혼자가 아니라는 복음의 위로가 전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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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실천

뉴스에서 전해지는 죽음과 고통을 숫자로만 지나치지 않았는지 돌아보겠습니다. 슬픔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이유를 설명하거나 힘내라고 재촉하지 않고, 먼저 안부를 묻겠습니다. 위로의 말이 떠오르지 않더라도 곁을 지키고, 그에게 필요한 도움을 살피겠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생명의 존엄도 똑 같음을 기억하겠습니다. 또한 제 마음이 지쳐 있다면 모든 짐을 혼자 지려 하지 않고 주님께 아뢰며 도움을 구하겠습니다. 오늘은 누군가의 눈물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는 작은 사랑을 실천하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긍휼의 하나님, 너무 먼 곳의 아픔이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죽음과 눈물을 쉽게 지나쳤던 저의 무관심을 용서하소서. 제 편이라 생각되는 사람들의 고통에는 민감하면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의 슬픔에는 차가웠던 마음을 돌이키게 하소서. 이름을 모를지라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귀하게 여기며, 울고 있는 이에게 해답을 말하기보다 함께 울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오늘은 제 작은 손길이 외로운 사람에게 주님의 위로를 전하고 생명을 살리는 사랑의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