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사무엘상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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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의 두 주인공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지만 결코 같은 길을 걷지는 않는다. 마리아브론 수도원의 수련수사이자 수도원학교의 보조교사였던 나르치스는 수도원 학교에 입학한 골드문트는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나르치스는 누구보다 골드문트를 아꼈지만, 그가 수도원에 머물기보다 “골드문트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가 수도원을 떠나 세상으로 떠나는 것을 막지 않는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를 곁에 두고 싶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나만 바라봐 주기를 바라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며, 나와 같은 꿈을 꾸며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을 같은 속도로 함께 걸어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를 소유하려 하고,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인생길을 대신 결정해 버리곤 한다.
그러나 사랑이 깊어진다는 것은 어쩌면 “너는 나와 달라도 괜찮아. 너는 내가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가도 좋아. 네가 내 곁을 떠난다고 해서 우리가 나눈 진실한 사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아” 라는 고백을 배우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성경 속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그랬다.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은 왕위를 이어받을 후계자였고, 백성들의 칭송을 받는 다윗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는 경쟁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요나단은 자신을 지키는 대신 다윗에게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정해 주었다. 그는 위기에 처한 친구의 생명을 보호했고, 마침내 그를 축복하며 떠나보낸다.
서로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깊었던지, 이별의 순간에는 서로를 안고 눈물을 흘렸다. 요나단은 “내 곁에 남아 달라”고 강요하지 않았고, 대신 “평안히 가라”고 말한다. 이 말은 체념이 아니라, “내가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네 인생까지 소유하려 하지 않겠다. 내가 함께 가줄 수 없는 그 고난의 길에서도 하나님이 너와 동행하시기를 기도한다”라는 사랑의 마침표였다.
우리의 삶에도 이처럼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는 계절이 찾아온다. 품 안의 자녀가 부모가 바라는 길과는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할 때가 있고, 오랜 기간 함께했던 사람이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떠나기도 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는 다른 꿈을 품고 먼 곳을 바라보기도 한다. 서로 사랑하지만 같은 길을 함께 걸을 수 없는 관계도 있다. 그때 마음 한편에 “내가 조금만 더 붙잡았더라면 달라졌을까”, “내 사랑이 부족해서 그가 떠난 것은 아닐까”라는 씁쓸한 질문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이별과 떠남이 사랑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상대를 흔쾌히 보내주는 것도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가 내 품에 있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해 마련해 두신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어주는 것도 사랑이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를 보내주었다. 골드문트는 세상을 떠돌며 숱한 사랑과 상처를 온몸으로 경험하며 예술가가 되었다. 긴 세월이 지나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예전의 청년이 아닌 지치고 병든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나르치스는 그를 받아들인다. 서로 떨어져 보낸 세월이 무색할 만큼 그들의 사랑은 옅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삶의 끝자락에서 더 분명해졌다. 나르치스는 죽어가는 골드문트에게 자신이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 감정을 마음에 담아두며 기도했는지를 고백한다. 골드문트가 자기와 다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잊힌 존재가 아니라, 자신과 다른 삶을 살았기에 자신의 세계를 넓혀준 보석이었던 것이다.
우리도 모든 사랑을 끝까지 한결 같은 형대로 묶어둘 수는 없다. 어떤 사람은 좀 더 내 곁에 머물고, 어떤 사람은 잠시 스쳐 지나듯 내 곁에서 떠난다. 날마다 얼굴을 마주하며 살아가는 인연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인연은 기억과 기도 속에서만 이어진다. 그러나 물리적인 거리가 사랑의 깊이를 가능하는 척도가 될 수는 없다. 같은 공간에 머물지 못한다고 해서 가슴에 새겨진 진심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는 사람을 하나님은 여전히 품에 안고 계시며, 내가 함께 걸어가 줄 수 없는 길에서도 하나님은 이미 먼저 다가가 그와 함께 계신다. 나의 울타리를 벗어났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보호하심 밖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때로는 상대를 꼭 쥐었던 손을 조용히 펼치며, “주님, 이제 내 연약한 손을 거두고 신실하신 주님의 손에 소중한 이의 삶을 맡깁니다”라고 기도하며 기꺼이 놓아주는 것이다.
혹시 오늘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해서 가슴이 저리다면, 자신을 너무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픔은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훈장이다. 그 사랑이 진실했다면, 멀리 떨어진 뒤에도 그 사람의 삶을 축복할 수 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평안히 가라”고 말했듯이, 우리도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 곁에 머물지 않아도 괜찮아. 네가 네게 주어진 길을 잘 걸어가면 좋겠어. 내가 네 곁에 함께 하지 못해도 하나님께서 언제나 너와 함께하실 테니까”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소유하려 붙잡는 사랑에서 상대를 축복하는 사랑으로 자라가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을 떠나보낸 뒤에도 하나님께서 나와 그 사람 사이를 잇고 계심을 믿는 것이 사랑의 마지막 언어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의 인생을 소유할 수는 없지만, 서로의 길을 축복할 수는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언제까지나 내 곁에 둘 수는 없어도, 그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무대를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할 수는 있다.
오늘의 실천
오늘은 언제까지나 제 곁에 붙잡고 싶었던 소중한 한 사람을 떠올려 보겠습니다. 생각이 달라 서운하게 갈라섰든, 환경이 바뀌어 아쉽게 멀어졌든, 그 사람을 제 곁에 가두려 했던 연약한 욕심을 하나님께 내려놓겠습니다. 대신 그 사람에게 허락된 삶의 길을 존중하며 마음 다해 축복하겠습니다. 마음을 전할 수 있다면 “당신의 새로운 길을 진심으로 응원합니다”라고 전하고,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그가 걸어갈 길을 위해 조용히 기도하겠습니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을 언제까지나 제 곁에 붙잡고 싶어하는 제 집착과 미련을 주님께 맡깁니다. 사랑이 소유나 통제가 되지 않게 하시고, 그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소명의 길을 당당히 걸어갈 수 있도록 축복하는 성숙한 사랑을 배우게 하소서. 제가 그와 함께 가줄 수 없는 고독한 길에서도 주님이 동행하심을 믿으며, 떠나보내야 하는 순간에는 눈물을 삼키며 “평안히 가라”고 축복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을 주소서. 오늘도 내 중심의 사랑을 넘어 상대방의 유익과 행복을 온전히 빌어주는 평강이 넘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