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목록

칼럼

2026년 8월 4일 묵상

오늘의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한복음 21:22)"

오늘의 묵상

학교에 다니는 자녀가 있는 한국의 가정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광경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학교에서 성적표를 받아온 아이에게 부모가 몇 점을 받았느냐고 묻는다. 아이는 칭찬을 기대하며 “95점이요”라고 대답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칭찬은 커녕 “조금만 더 노력하면 100점 맞을 수 있겠네. 다음엔 더 열심히 하자”라는 야속한 독려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래서 반에서 몇 등인데?”라는 질문의 결은 조금 다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1등이냐 2등이냐에 따라 부모의 반응이 그야말로 천지 차이로 갈린다. 점수를 통해 아이가 무엇을 이해하고 무엇을 모르는지 배움의 상태를 알 수 있지만, 등수는 아이가 다른 사람보다 앞섰는지 뒤처졌는지 만을 보여준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배움의 내용 자체보다 다른 이들 사이에서 자녀들이 서 있는 위치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95점이라는 우수한 점수를 받고도 96점을 받은 아이가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기쁨이 사라진다. 반대로 자녀의 점수가 기대에 못 미쳐도 다른 사람보다 등수가 높으면 이상하게 안심을 한다. 무엇을 얼마나 배웠는가보다 자녀의 위치가 어디인가가 마음의 평안을 결정짓는 셈이다. 비교는 대단히 편리한 도구다. 자신의 상태와 위치를 금방 알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교는 내 존재의 가치마저 타인의 위치에 따라 출렁이게 만들기 때문에 지극히 위험하다. 한국과 일본은 모두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사회적 풍토를 지니고 있다. 다만 그 시선이 향하는 방향에는 흥미로운 차이가 존재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남보다 뒤처지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이 강하게 작동하는 편이다. 반면 일본 사회에서는 “남들과 다르면 어떻게 하지?”라는 불안이 상대적으로 크게 작용한다. 한국의 불안이 사람들을 하나의 줄 맨 앞을 향해 끊임없이 달리게 만든다면, 일본의 불안은 그 줄 밖으로 탈선하지 않도록 스스로 잔걸음 하게 만든다. 한국에서는 남보다 앞서야 비로소 안도감을 느끼고, 일본에서는 남들과 결을 맞추어 어긋나지 않아야 비로소 안심한다. 비교의 목적이 한국에서는 순위와 성취인 경우가 많은 반면 일본에서는 소속감과 집단과의 조화인 경우가 많다. 물론 한국인과 일본인이 모두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도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걷는 이들이 있고, 일본 역시 명문대 진학을 사립 유치원부터 한국 못지않게 치열한 순위 경쟁을 벌이는 이들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나라의 문화가 더 우월한가 하는 이분법적 평가가 아니다. 서로 다른 사회 구조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어떠한 두려움을 심어왔는지를 관찰하는 일이다. 한국의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면 안 된다”는 조바심과 일본의 “다른 사람과 다르면 안 된다”는 동조 압박은 겉으로 보기에 정반대 같지만, 뿌리는 동일하다.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하나님에게서 구하지 못하고, 타인의 위치와 주변의 시선을 통해 입증 받으려 하는 결핍된 마음이다. 한국 특유의 뜨거운 교육열 뒤에는 깊은 역사적 배경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은 학문을 통해 관료로 등용되고 사회적 명예를 얻는 핵심 통로였다. 물론 교육 기회가 양반층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시험을 통해 신분이 상승한다는 상징적 강렬함은 민족의 DNA에 뚜렷이 새겨졌다. 한 사람의 합격은 개인의 성취를 넘어 가문의 영광이자 친족 전체의 자랑이었고, 자녀의 성공이 가문의 명예와 직결되는 문화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교육의 절박함은 더욱 커졌다. 정든 집과 토지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한순간에 잿더미가 될 수 있었고, 일터 역시도 정치나 경제의 변화에 따라 손쉽게 사라졌다. 그러나 머릿속에 축적된 지식과 손에 쥔 자격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유일한 자산이었다. 가난의 굴레 속에서도 자식만큼은 공부시켜야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믿음이 부모들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렸다. 실제로 농촌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가 배움을 통해 공무원이나 판검사, 의사와 기업인으로 출세하는 모습을 온 사회가 함께 경험했다. 그래서 교육은 단순한 학문 탐구가 아닌, 가난의 사슬을 끊어내는 사다리이자,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유산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강력한 믿음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선진국의 도움을 받던 한국을 눈부시게 성장시킨 원동력이 되어 지금은 도움을 주는 국가가 되었다. 부모들은 먹고 싶은 것을 참아가며 자녀의 필요를 채워주었고, 논밭과 소를 팔아 대학 등록금을 대었다. 어느 가정에서는 똑똑한 동생의 학비를 위해 형과 누나가 자신의 꿈을 접고 공장과 일터로 나서야 했다. 물론 이러한 희생을 그저 기형적인 교육열이라고 손가락질할 수는 없다. 그 바탕에는 자식만큼은 나보다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는 숭고하고 깊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순수한 사랑에 ‘두려움’이라는 불순물이 섞이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내 자녀가 더 좋은 기회를 얻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소망이 “내 자녀가 남들보다 반드시 앞서야 한다”는 조급한 불안으로 변질된 것이다. 어느덧 교육은 아이가 세상을 넓게 이해하고 자아를 발견하도록 돕는 여정이 아니라, 끊임없는 경쟁에서 생존해야 하는 각축장이 되었다. 성적은 자녀의 학습상태를 보여주는 객관적 지표가 아니라, 부모로서 책임을 다했는지 평가하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성적표로 전락했다. 자녀의 성공과 실패가 곧 부모의 성공과 실패로 직결되는 순간, 부모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다 어려워진다. 아이의 느린 걸음을 느긋하게 기다려주지 못한다. 우리 아이보다 옆집 아이가 먼저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면 가슴이 철렁하고, 다른 아이가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푼다는 소식에 조급 해진다. 이웃집 자녀가 명문대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축하하면서도 속으로는 마음이 무거워진다. 사교육이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학원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학원에 보내지 않았다가 혹여 아이가 뒤처지면, 부모로서 마땅히 해주어야 할 본분을 다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의 짐을 지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사교육은 성적을 올리는 수단을 넘어 부모 자신의 불안을 낮추는 보험이 되어버린다. 선행학습을 시작한 집 아이는 잠시 앞서갈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가정이 선행학습에 뛰어들면, 결국 모든 아이가 더 어린 나이부터 더 오랜 시간 동안 학업에 시달려야 한다. 명문대의 정원과 좋은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경쟁을 위해 쏟아붓는 돈과 시간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난다. 각 가정에서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 최선을 다해 달린 결과, 역설적이게도 아무도 멈출 수 없는 잔혹한 경주가 완성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과열경쟁이 안겨주는 깊은 슬픔이다. 경쟁 그 자체가 언제나 악한 것은 아니다. 선의의 경쟁은 타성에 젖은 게으름을 깨우고 스스로 몰랐던 잠재력을 발견하게 돕는다. 건강한 비교 역시 타인의 훌륭한 점을 보며 배우는 성장에 필요한 자극이 된다. 문제는 비교가 배움의 도구를 넘어서서 ‘존재의 가치를 측정하는 저울’이 될 때 발생한다. 타인보다 우월해야만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뒤처지면 가치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고 믿기 시작할 때 비교는 우상이 된다. 성경에 비교라는 우상이 한 사람의 영혼을 어떻게 참담하게 무너뜨리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인물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이 나온다. 사울은 이미 백성의 존경을 받는 영웅이었고,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여인들이 부른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라는 노래 한 구절이 그의 영혼을 순식간에 흔들어 놓았다. 사울 역시 천 명을 격퇴한 대단한 장수였지만, 다윗의 ‘만 명’과 비교하는 순간, 자신이 거둔 ‘천 명’의 승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비교는 사울이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수많은 은혜를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려버렸다. 다윗을 향한 백성들의 환호로 다윗의 능력이 왕인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칼날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다윗은 함께 나라를 지켜야 할 부하 장수가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정적으로 바뀌었다. 비교는 소중한 이웃을 순식간에 적으로 바꾼다. 타인의 성공이 나에게 위협으로 다가오며, 다른 이의 재능이 내 열등감을 자극하는 증거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비교에 사로잡힌 마음은 결국 두 가지 그릇된 길 중 하나로 치닫는다. 타인보다 앞섰을 때는 교만에 빠져, 자신의 성공이 온전히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이뤄진 줄 착각하며, 뒤처진 이들을 게으르고 무능하다며 손쉽게 비난한다. 반대로 뒤처졌을 때는 깊은 열등감의 늪에 빠져 자신에게 허락된 은혜를 까맣게 잊은 채, 타인처럼 되지 못한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자학한다. 교만과 열등감은 겉보기에 양극단에 있는 듯하지만, 뿌리는 완벽히 같다. 두 마음 모두 하나님의 평가가 아닌, 타인과의 비교를 자신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길을 내어주지 않으신다. 어떤 이는 뿌리를 얕게 내렸지만 봄날에 일찍 꽃을 피우고, 어떤 이는 깊은 땅속에 뿌리를 내리느라 뒤늦게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 어떤 사람은 화려한 무대 위에서 수많은 사람을 이끌고, 어떤 사람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한 영혼을 묵묵히 돌본다. 어떤 이는 학문적 지식으로 봉사하고, 어떤 이는 손재주와 노련한 기술로 세상을 이롭게 한다. 어떤 이는 탁월한 언변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어떤 이는 그저 조용히 들어주는 깊은 공감으로 상처 입은 이들을 살려낸다. 세상이 단 하나의 획일적인 자로 모든 사람을 재단하면 대다수의 사람은 실패자로 낙인찍힌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을 결코 하나의 줄에 세우지 않으신다. 한국 사회가 두려워하는 것은 ‘뒤처지는 것’이기에 더 빨리, 더 높이 올라가라고 끊임없이 재촉한다. 일본 사회가 두려워하는 것은 ‘남들과 달라지는 것’이기에 집단의 평균적 틀을 벗어나지 말라고 압박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남들보다 무조건 앞서라”고 독촉하지도, “남들과 완전히 똑같아져라”고 강요하지도 않으신다. 따뜻한 음성으로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실 뿐이다. 인생은 타인을 제치고 1등으로 결승선에 도달하는 격렬한 레이스가 아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똑같은 옷을 입고 같은 속도로 맞춰 걷는 군대의 행진도 아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한 걸음씩 걸어가는 거룩한 여정이다. 자녀교육의 현장에서 비교는 자녀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자녀에게 더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쓰는 부모의 마음은 귀하지만 부모가 잊지 말아야 할 진리가 있다. 자녀는 부모 자신의 성공과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소유물'이나 '작품'이 아니다. 자녀가 입학한 대학과 직장의 이름이 부모 인생의 성적표가 될 수도 없다. 자녀는 부모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이루어줄 대리인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고유한 인격과 부르심을 담아 부모에게 잠시 맡겨 주신 소중한 생명이다. 부모는 자녀의 미래를 설계하고 통제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부여하신 고유한 모습을 자녀 스스로가 발견할 수 있도록 곁에서 조력하는 청지기일 뿐이다. 남들만큼 풍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지 못했다고 사랑이 부족한 부모가 아니다. 고가의 사교육을 제공하지 못했다고 책임을 방기한 것도 아니다. 좋은 부모는 자녀를 남들보다 앞줄에 세우려 노력하는 부모가 아니라, 자녀가 치열한 경쟁에서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끊임없이 격려하며 믿어주는 부모다. 성적이 오를 때만 웃어주는 부모가 아니라, 실패의 아픔을 겪을 때도 따뜻하게 곁을 지키는 부모다. 세상의 서열화된 기준과 다른 길을 선택하더라도, 그 길이 선한 길이라면 기꺼이 박수를 보내주는 부모다. 아이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어떤 경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도록 하는 완벽한 스펙이 아니다. 경쟁에서 패배했을 때조차 "너의 존재 가치는 조금도 훼손되지 않는다"는 부모의 절대적인 확신이다. 교육비 부담 때문에 출산을 두려워하는 이 시대의 비극 역시 이 문제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많은 젊은 부부가 아이 자체를 싫어해서 부모가 되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로서 제 역할을 다하려면 번듯한 내 집, 값비싼 학원비와 대학 등록금까지 완벽히 준비되어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이다. 아이에게 최고를 해주지 못할 바에는 아예 낳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고, 두 아이를 공평하게 지원할 엄두가 나지 않아 둘째를 포기한다. 아이를 생명의 축적과 축복으로 바라보기보다, 감당해야 할 무거운 장기 채무로 계산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사회구조적 모순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명문대 타이틀과 좋은 일자리가 수도권과 일부 영역에만 지나치게 몰려 있고, 단 한 번의 실패가 인생 전체의 낙인이 되는 구조 속에서는 부모에게 무작정 "경쟁을 내려놓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지나친 개인주의의 산물로만 돌리지 않고, 누구나 존엄성을 인정받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명문대를 나오지 않더라도 성실한 노동으로 정당한 대가를 받으며 안락한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 지방에 살더라도 질 높은 교육과 좋은 일자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하며,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새로 출발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성적이나 학벌, 직업이나 재산의 크기로 평가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신앙인들에게도 비교의 잡초는 쉽게 자란다. 누구 자녀가 좋은 대학에 진학했고, 더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는지를 은밀하게 비교한다. 비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성장을 포기한 채 현실에 안주하는 게으름이 아니다. 오히려 내게 주어진 삶의 책임을 더 정직하고 철저하게 바라보는 집중이다. 타인의 속도나 위치를 살피느라 정작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권면한다. 타인이 걸어가는 길을 함부로 비평하고 평가하기 전에, 나에게 맡겨진 소명을 정직히 점검하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앞서가고 있는지가 아니라, 내가 어제보다 오늘은 얼마나 더 정직해졌는가를 살펴야 한다. 남들보다 더 많은 자산을 소유했는지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재능과 시간과 물질을 얼마나 선하게 사용했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남들과 똑같이 행동했는지가 아니라, 내게 허락된 소명에 얼마나 충성했는가를 물어야 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비교’와 완전히 동떨어진 삶을 사는 것은 무리다. 중요한 것은 비교로 인한 시선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타인을 꺾고 이기기 위해 비교하지 말고, 겸손히 배우고 배려하기 위해 타인을 바라보아야 한다. 친구와 이웃의 성공을 나의 실패를 증명하는 암울한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사람마다 다른 다양한 재능을 주셨음에 감사하는 통로로 삼아야 한다. 남들보다 뒤처졌다고 느껴질 때일수록, 더 빨리 달리기 위해 채찍질하기 전에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방향인지 멈추어 서서 살펴야 한다. 남들과 다르기에 고독함을 느낄 때일수록, 무작정 자신을 숨기거나 남들과 똑같아지려 애쓰기보다 내게 있는 ‘다름’이 무엇인지 겸손히 물어야 한다. 모든 꽃이 다 똑같은 모양과 색깔로 피어있다면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꽃마다 피어나는 계절이 다를 뿐 아니라, 고유한 색채와 모양 그리고 향기가 각기 다르기에 더 아름답다. 봄에 피어난 개나리가 가을에 피어날 국화를 향해 늦게 피었음을 타박하지 않는다. 높이 자란 나무가 바위 틈새의 작은 들풀을 향해 쓸모없다고 비웃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창조는 획일적인 복제가 아니라, 다채로움이 어우러지는 조화다. 우리는 남들보다 앞서야만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는 위태로운 존재가 아니다. 남들과 똑같아져야만 비로소 안전해지는 불안한 존재도 아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 최고의 사랑을 이미 받은 존귀한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조급하게 세상의 기준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일 필요가 없다. 타인의 인정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고유한 모습과 색깔을 숨길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오늘도 비교로 인해 번민하는 우리를 향해 “저 사람의 위치와 모습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다.

오늘의 실천

“하나님, 세상의 서열과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던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남들보다 뒤처질까 봐 두려워하는 조바심과 남들과 달라질까 봐 눈치를 보는 불안에서 저희를 건져주시고, 오직 하나님이 주신 고유한 가치와 은혜에 뿌리를 내리게 하소서. 타인의 성취를 질투하거나 나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비교의 자로 이웃을 재단하지 않게 하시고, 이웃의 성공에 함께 기뻐하며 서로의 다름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함을 찬양하게 하소서. 자녀와 다음 세대를 부모의 성공을 증명할 수단으로 대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고유한 생명으로 존중하며 사랑과 신뢰로 곁을 지키는 청지기가 되게 하소서.” 오늘은, "저 사람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주님의 음성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고, 다른 사람의 위치나 모습에 미혹되지 아니하며 내게 주어진 재능을 마음껏 드러내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