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이사야 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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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전에는 처음 만난 사람도 성씨가 같으면 자연스럽게 본관이나 돌림자를 물었다. “어디 서씨입니까?”, “무슨 파 몇 대손입니까?”, “돌림자가 어떻게 되지요?”와 같은 질문이다. 요즘 세대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지만, 3-40년 전만해도 성씨와 본관은 단순한 성명이 아니었다. 상대가 어느 뿌리에서 나왔으며 어떤 관계망 속에 속해 있는지를 알려주는 정체성의 지도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인의 이름은 개인의 표식인 동시에 가문의 유산이었다. 이름에 포함된 돌림자 하나로 금세 촌수를 따져 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혼자가 아니라, 내 앞에 부모와 조부모, 그리고 수많은 선조가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집집마다 족보가 있었고, 종가에는 오래된 위패와 제기를 보존하였다. 문중은 선산을 돌보고 문중 사업을 꾸렸으며, 어려운 친족의 생계나 그들 자녀의 학업을 돕기도 했다. 명절이 되면 평소에는 흩어져 살던 친족들이 고향으로 모여들었다. 사는 환경이나 성격은 제각각 이어도 “우리는 한 피를 나눈 집안”이라는 테두리가 서로를 하나로 묶어주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일손을 나누었고, 경조사에는 문중이 총동원되었다. 복지제도가 부실했던 시절, 혈연은 삶을 떠받치는 가장 든든한 안전망이었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네 뒤에는 가족과 문중이 있다”는 소속감은 불안한 시대를 견디게 하는 안정망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부계 중심의 혈연문화가 처음부터 견고했던 것은 아니다.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만 해도 친가와 외가의 구분이 엄격하지 않았고, 딸과 아들이 재산을 비슷하게 상속받았다. 사위가 처가에서 오래 거주하거나 외손이 외가의 제사를 맡는 일도 자연스러웠다. 변화는 조선 중 후기 성리학적 예법이 사회 규범으로 정착되면서 찾아왔다. 가문의 계보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직선으로 철저하게 정돈되었고, 제사와 종가의 책임은 장자에게 집중되었다. 친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일 때도 반드시 같은 성과 본관을 가진 같은 돌림(항렬)인 부계 혈족 안에서 찾아야 했다. 혈통의 정통성을 보존하고 제사를 끊기지 않게 하는 일이 우선시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의 전통적인 가족 구조인 ‘이에(家)’와 대비된다. 일본의 ‘이에’는 혈통이 달라도 능력이 있으면 성이 다른 사위나 종업원을 가문의 후계자로 받아들였다. 한국의 종족문화가 “누가 이 가문의 정통 후손인가?”를 물었다면, 일본의 ‘이에’는 “누가 이 집과 가업을 계속 이어갈 것인가?”를 물었던 것이다. 이런 질문의 차이는 기록문화의 성격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족보는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누가 누구의 아들이며, 어느 가문과 혼인했고, 어떤 관직에 올랐는지를 기록하여 혈연의 정체성을 보존해 주었다. 심지어는 이런 저런 사정으로 고향을 떠나도 성과 본관, 항렬과 족보를 통해 자신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 조상이 어떤 기술을 가졌고 그 기술을 어떻게 전수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장부나 기록은 상대적으로 드물었다. 한국은 가문이라는 혈연의 역사를 남겼고, 일본은 가게와 기업이라는 조직의 역사를 남긴 셈이다. 가문의 명예를 지키려는 마음은 강력한 도덕적 자율 규제로 작동했다. “집안 망신시키지 마라”, “조상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라”라는 가르침은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을 통제하게 만들었다. 내 행동 하나가 가문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식은 눈앞의 이익보다 장기적인 신용과 도덕성을 선택하게 돕는 긍정적인 힘이었다. 그러나 혈연의 울타리가 과도하게 두꺼워지면 사람을 보호하기보다 가두는 장벽이 된다. 가문의 체면이 개인의 생명이나 진실보다 우위에 설 때 비극이 시작된다. 집안의 명예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피해자의 입을 막고, 집안의 잘못을 “남이 알면 망신”이라는 이유로 은폐하기도 하였다. 사람을 지키기 위해 존재해야 할 가문이, 어느새 가문을 지키기 위해 사람을 희생시키는 주객전도의 상황이 생긴 것이다. 또한 혈연은 사람을 안과 밖으로 갈라놓았다.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너그럽지만,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냉정했다. 공적인 업무에서도 실력과 정직함보다 학연·지연·혈연을 우선시하는 연고주의로 변질되기 쉬웠다. 내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귀하지만, 그것이 타인의 기회를 빼앗는 특혜가 되고 차별이 될 때 사랑은 이기적인 카르텔로 전락한다. 더불어 족보는 누군가의 뿌리를 보존하는 귀한 기록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또 다른 계급과 서열의 도구가 되기도 했다. 양반과 서얼, 가문의 귀천을 가르는 기준이 되어 한 사람의 인품보다 출신을 먼저 평가했다. 무엇보다 여성들의 존재는 옅게 지워졌다. 가정을 지키고 자녀를 낳고 양육하며 삶의 터전을 실질적으로 떠받쳤던 여성들은 그저 “아무개의 딸”, “아무개의 처”라는 짧은 기록으로만 남겨졌다. 성경에도 수많은 족보가 등장한다. 하지만 성경의 족보는 흠 없는 가문의 순혈통을 자랑하는 명단이 아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에는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처럼 당시 가부장적 관습으로는 결코 전면에 내세울 수 없었던 여성들의 이름이 정면으로 등장한다. 그들 중에는 이방인도 있었고, 치명적인 약점과 상처를 가진 이들도 있었으며, 사회적 그늘 속에 있던 이들도 있었다. 이렇게 하나님은 구속의 역사를 기록하시면서 인간적인 기준에 맞춰 거룩하고 아름다운 부분만 골라 편집하지 않으셨다. 성경의 족보는 순수한 혈통을 증명하는 문서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모든 울타리를 극복하여 이어지는 하나님의 경이로운 은혜를 증명하는 기록이다. 오늘의 말씀인 이사야 56장은 당시 사회의 혈통의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 있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파격적인 선언이다. 고대 사회에서 자녀가 없다는 것은 가문의 계보가 끊어지고 자신의 존재가 잊혀짐을 의미했다. 특히 신체적 한계로 자녀를 가질 수 없는 이들은 족보에서 영원히 사라질 절망에 직면해 있었다. 하나님은 그런 이들을 향해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라고 선언하신다. 사람의 혈통과 족보 안에서는 이름이 끊어질 수 있지만, 하나님의 집에서는 결코 끊어지지 않는 영원한 이름을 얻게 된다는 약속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혈연과 가족을 부정하지 않으신다. 부모를 공경하고 가족을 돌보는 책임을 십계명에 둘 만큼 귀하게 여기신다. 하지만 혈연을 절대화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의 가족은 피의 경계를 넘어선다. 성과 본관이 다르고 언어와 출신이 달라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한 가족이 되는 거룩한 확장을 이루어 내신다. 참된 신앙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부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배운 사랑을 울타리 밖의 낯선 이들에게로 흘려보내는 것이다. 내 자녀를 아끼듯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살피고, 내 형제의 어려움을 돕는 마음으로 낯선 사람의 고통에도 응답하고, 내 부모를 대하듯 어려운 노인이나 홀로 된 이웃을 섬기는 삶이다. 사랑이 혈연에만 갇히면 폐쇄적인 족벌주의가 되지만, 담장을 넘어 흐르면 세상을 살리는 환대가 된다. 좋은 가족은 자기 식구만 감싸는 가족이 아니라, 낯선 사람이 들어와도 안전하다고 느끼는 가족이다. 사위와 며느리를 영원한 외부인으로 대하지 않고 새로운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집이다. 피를 나누지 않은 사람에게도 밥 한 그릇과 잠잘 자리를 내어줄 수 있는 집이다. 우리는 선대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받는다. 그 중에는 계속해서 이어가야 할 찬란한 유산도 있지만, 내 세대에서는 반드시 끊어내야 할 어두운 습관과 상처도 있다. 선조들의 정직과 근면, 이웃을 돌보던 책임감과 효의 태도는 소중히 계승해야 한다. 그러나 집안의 체면을 위해 진실을 은폐하던 습관, 차별과 편가르기, 어른이라는 이유로 사과하지 않는 고집, 가족이라는 핑계로 개인의 삶을 통제하려 들던 언행들은 우리 세대에서 끝내야 한다. "우리 집안 사람들은 원래 화를 잘 내", "우리 가문의 내력이 그래"라는 말로 부당한 습관을 정당화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 안에서는 집안의 내력보다 은혜의 능력이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다. 나는 부모로부터 사과를 받아본 적이 없을지라도 나는 자녀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고, 나는 차별을 받으며 자랐어도 나는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한다. 가족의 상처는 운명이 아니며, 우리가 말씀 앞에 바로 설 때 우리 세대부터는 오랜 아픔과 상처와 차별을 멈추는 거룩한 전환점이 되어야 한다. 진정으로 가문을 빛내는 일은 높은 직책을 갖거나 많은 재산을 남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 집안은 약한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아름다운 전통을 세우는 일이며, "우리 집안은 잘못했을 때 나이와 상관없이 정직하게 사과한다"는 문화를 남기는 일이고, "우리 집 식탁에는 언제나 외로운 이웃을 위한 빈 의자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전해주는 일이 진짜 유산이다. 아이들은 종이에 적힌 족보보다 매일 눈앞에서 펼쳐지는 부모의 삶과 언어, 식탁의 분위기를 통하여 가문의 진짜 정체성을 배운다. "나는 누구의 후손인가?"라는 질문에 머물지 않고, 신앙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는 오늘 누구에게 좋은 선대가 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혈통은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주어지지만, 영적인 유산은 오늘 결정하고 실천하는 성실한 선택으로 만들어진다. 하나님은 우리의 성씨와 본관을 지우지 않으시되,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영원한 이름을 우리에게 부여하신다. 주어진 이름을 가지고 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그 사랑을 다시 흘려 보낼 때, 혈연은 닫힌 감옥이 아니라 세상을 온전히 품는 깊고 푸른 뿌리가 된다.
오늘의 실천
“하나님, 내 판단과 상식만을 절대화하며 상대방의 사연을 다 듣기도 전에 마음속으로 이미 결론을 내리고 판결문을 썼던 저의 미련함을 회개합니다. 같은 언어를 쓴다는 이유로, 혹은 가깝다는 핑계로 상대의 마음을 다 안다고 착각하며 내 방식의 사랑과 배려만을 강요했던 조급함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의 익숙한 혈연과 경험, 가문의 관습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상대방의 말 뒤에 숨은 아픔의 문법을 세심하게 살필 수 있는 겸손한 귀와 마음을 허락하소서. 지레짐작과 오해로 벽을 세우기보다, 정중히 묻고 경청하며 상대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는 성숙한 인내를 주소서. 제가 속한 가정과 일터,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나만의 언어와 기득권만을 요구하지 않게 하시고, 피를 나누지 않은 낯선 타인도 기쁨으로 환대하게 하소서. 제 입술의 말이 상대의 인격과 체면을 지켜줄 만큼 부드럽게 하시고, 오해가 생기지 않을 만큼 정직하고 분명하게 하소서. 선대로부터 내려온 어두운 습관과 차별의 굴레는 제 세대에서 용기 있게 끊어내게 하시고, 오직 정직과 사랑, 겸손의 유산만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좋은 선대가 되게 하소서. 성급한 단정을 거두고 다정한 확인을 통해 오해를 이해로 바꾸어 가는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오늘은, 내 마음대로 상대를 규정하려 할 때 한 자락 멈추어서서, 타인의 진짜 사연에 깊이 귀 기울이고 하나님의 넓은 품으로 이웃을 품어안는 정직하고 지혜로운 삶을 사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