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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24일 묵상

오늘의 말씀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잠언 18:13)"

오늘의 묵상

한국의 S기업 영업부 김 부장이 일본 거래처를 방문해 야심 차게 준비한 신사업 계획을 설명했다. 시장 전망부터 예상 매출, 마케팅 전략까지 열정적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맞은편에 앉은 일본인 임원들은 “하이(네)”, “소오데스네(그러네요)”, “나루호도(그렇군요)”라고 맞장구를 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의 긍정적인 반응에 힘을 얻은 김 부장은 회의 후 회사로 돌아와 “일본 측 반응이 폭발적이다. 사실상 합의된 것이나 다름없다”라고 자신 있게 보고했다. 그런데 며칠 뒤, 일본 회사로부터 “사내 검토 결과, 이번 제안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라는 뜻밖의 연락이 왔다. 당황한 김 부장은 일본 담당자에게 연락하여 “회의 때 모두 ‘하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라며 항의하자 오히려 일본인 담당자는 김부장의 해석에 더 황당하했다. 들에게 ‘하이’는 제안에 대한 승낙(OK)이 아니라, “당신의 설명을 잘 듣고 있다”는 경청의 표시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같은 회의실에 앉아 있었지만 전혀 다른 의사소통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한 한국인이 일본인 친구에게 이사를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이번 토요일 오전에 이사하는데 도와줄 수 있어?” 일본인 친구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토요일에는 조금 어려워.”라고 대답했다. 한국인은 ‘조금’이라는 단어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그럼 오후는?” 하고 질문하자 “오후도 조금…”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도움이 급한 마음에 “그럼 저녁에 한 시간만이라도”라고 묻자 일본인 친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일본인 친구는 첫 번째 대답에서 이미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생각했지만, 한국인은 그것을 협상 가능한 여지로 받아들인 것이다. 한국인에게 “조금”은 “조건을 바꾸면 가능하다”로 들렸지만, 일본인에게 “조금(ちょっと)”는 “이번에는 안돼”라는 완곡한 거절의 표시였던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나름의 예의를 지켰지만, 결과적으로는 서로에게 부담을 주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런 오해는 식탁에서도 생긴다. 한국인은 정의 표시로 “많이 먹어”, “이것도 먹어봐”, “왜 이렇게 조금만 먹어, 더 줄게”라며 계속 음식을 권한다. 일본인 친구가 “괜찮다”라고 말했지만 한 번에 멈추면 무심해 보일까 봐 재차 권하는 것이 한국의 정이다. 하지만 일본인 친구가 이미 “괜찮다”라고 거절의 의사를 밝혔음에도 계속 음식을 권하면 난처한 부담이 될 수 있다. 거절하기 미안해 억지로 먹으면서도 ‘괜찮다는 내 말을 왜 믿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마음이 매우 불편하다. 처음 만난 사람들의 대화도 한 번 살펴보자. 누군가를 처음 만난 한국인은 빠르게 친해지고 싶어 “고향이 어디세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결혼은 하셨나요?”, “자녀는 몇 명이에요?”, “무슨 일을 하세요?”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자신과 접점을 찾아 마음의 거리를 좁히려는 시도다. 하지만 사적 경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일본인에게 친해지지 않은 관계에서의 이런 질문은 사생활 침해로 느껴진다. 한국인은 '관심'으로 한 질문이 일본인에게는 '무례함'으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연락을 주고받는 방식도 다르다. 일을 부탁받은 일본인이 확정된 결과가 나올 때까지 며칠간 연락을 하지 않았다. 불확실한 과정을 전해 상대를 번거롭게 하지 않는 것이 배려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인은 ‘늦어지면 늦어진다고 연락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 기다리는 내내 불안해한다. 한쪽은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였지만, 다른 쪽은 ‘무시당했다’고 느끼는 비극이 생긴다. 사람들은 이처럼 자신의 문화가 정한 상식으로 선의를 표현하지만 그 선의가 언제나 선의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질문이 간섭으로 받아들여지고, 배려의 침묵이 무관심이 되며, 솔직한 표현이 공격으로 취급되고, 부드럽게 돌려 말한 것이 책임회피로 오인될 수 있다. 한국인은 가까운 사이일수록 감정을 솔직하게 터놓아야 관계가 회복된다고 믿는다. “솔직히 섭섭했어”, “우리 사이니까 말하는 거야”라며 직설적으로 풀고 함께 식사하며 털어내려 한다. 그러나 일본인은 감정이 직접적으로 표출되면 관계 자체가 깨질 수 있다고 여긴다. “그 부분이 조금 마음에 걸리네요”라는 일본인의 표현 속 ‘조금’은 전체를 재검토하라는 강한 불만이지만, 한국인은 이를 단순한 아쉬움 정도로 가볍게 넘겨버리기 쉽다. “이번에는 조금 유감이었습니다”라고 표현하는 일본인의 마음에는 이미 매우 강한 불만이 있지만 그 “조금”이라는 단어로 한국인은 약간 서운하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는 엇갈림이 발생한다. 물론 모든 한국인이 직접적이고 모든 일본인은 간접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개인의 성격과 세대, 직업과 관계에 따라 차이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문화라는 큰 틀에서 보며 나라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문화적 문법’이 있다. 단어와 문법을 습득하며 외국어를 학습하지만, 실제로 중요한 것은 그 말 뒤에 감추어진 문맥과 문화적 문법을 배우는 일이다. 똑 같은 “네”가 동의인지 경청인지, 똑 같은 “어렵다”가 고민인지 거절인지, 침묵이 생각의 결과인지 불만의 결과인지, 사적인 질문이 관심인지 침범인지 가려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이러한 오해는 한일관계에서는 물론 한 지붕 아래에 사는 부부나 가족간에도 발생할 수 있다. 자주 연락하는 것이 사랑이라 믿는 아내와, 신뢰하기에 자주 묻지 않는다는 남편의 갈등이 그렇다. 누군가는 “괜찮아”를 액면 그대로 정말 괜찮다는 뜻으로 사용하지만, 누군가는 더 이상 묻지 말아 달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같은 언어를 쓴다고 해서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이 더 큰 오해를 낳는다. 우리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내가 왜 화났는지 말해야 알아?”, “이 정도 마음도 몰라줘?”라며 상대가 내 마음을 짐작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상대는 정말로 모를 수 있다. 오해는 상대의 설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내가 내 기준으로 상대를 조급하게 단정 짓기 때문에 시작된다. 잠언은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사람을 미련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귀에 전달되는 상대의 말 만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는 상대의 말을 들으면서도 이미 머릿속으로 자신만의 판결문을 쓰곤 한다. 상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저 사람은 원래 이기적이야’, ‘또 변명을 하려는 거야’, ‘나를 무시해서 저렇게 말한 거야’, ‘관심이 없으니 연락하지 않은 거야’ 라며 결론을 내린 채 대화하면, 상대의 말은 내 편견을 뒷받침하는 증거로만 취급될 뿐이다. 답장이 늦으면 나를 무시한다고 단정하고, 표정이 어두우면 내게 화가 났다고 단정하며, 내게 질문하지 않으면 내게 관심이 없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답장이 늦은 사람은 그저 바빴을 수 있고, 표정이 어두운 것은 몸이 아팠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나의 사생활을 존중하여 질문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 짐작과 눈치로 상황을 알아채려 하는 것은 위험하다. 지나친 추측은 사실보다 내가 만들어낸 가상의 소설을 더 믿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급한 단정보다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해도 될까요?”, “지금 말은 안 된다는 뜻인가요?”, “제 제안을 이해하셨다는 뜻인지, 아니면 동의한다는 뜻인지요?”, “제가 너무 사적인 질문을 했다면 답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인지, 아니면 곁에 있어도 된다는 뜻인가요?”와 같은 성숙한 확인이 필요하다. 이러한 질문은 상대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내 해석을 절대화하지 않기 위한 겸손한 장치다. 좋은 대화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히 전달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상대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확인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참된 사랑은 상대의 마음을 내가 지레짐작하여 결정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자신의 진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이 원리는 서로 다른 문화는 물론 다른 세대,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삶의 지혜다. 우리 모두는 존중받고 싶고,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이해받기를 원한다. 다만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가 다를 뿐이다. 성숙한 사람은 상대에게 나의 언어만 강요하지 않고, 익숙지 않은 상대의 사랑의 언어도 배우려 노력한다. 어떤 사람은 직접적인 표현으로 관계를 유지하지만, 어떤 사람은 말을 아끼며 관계를 지킨다. 하지만 관심도 배려도 여러 가지 언어와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좋은 말은 상대의 체면을 세워줄 만큼 부드럽고, 오해가 없을 만큼 분명한 말이다.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살피고, 표현 뒤에 숨은 문화와 성향의 문법을 읽어내자. 추측보다 확인을 선택하자. 상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조급히 대답하지 말고, 다 들은 뒤에도 제대로 이해했는지 다시 물어보자. 그 귀찮은 수고가 오해를 깊은 이해로 바꾸고, 서로의 차이를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다채로움으로 가꾸어 줄 것이다.

오늘의 실천

“하나님, 내 판단과 상식만을 절대화하며 상대방의 사연을 다 듣기도 전에 마음속으로 이미 결론을 내리고 판결문을 썼던 저의 미련함을 회개합니다. 같은 언어를 쓴다는 이유로, 혹은 가까운 사이라는 핑계로 상대의 마음을 다 안다고 착각하며 내 방식의 사랑과 배려를 강요했던 조급함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에게 내 기준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말 뒤에 숨은 문화와 성향, 아픔의 문법을 세심하게 살필 수 있는 겸손한 귀와 마음을 허락하소서. 지레짐작과 오해로 벽을 세우기보다, 정중히 묻고 확인하며 상대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는 성숙한 인내를 주소서. 제가 속한 가정과 일터에서 나의 사랑의 언어만을 요구하지 않게 하시고, 익숙하지 않은 타인의 언어도 기쁨으로 배우게 하소서. 제 입술의 말이 상대의 체면을 지켜줄 만큼 부드럽고, 오해가 생기지 않을 만큼 정직하고 분명하게 하소서. 성급한 대답을 거두고 경청을 선택하게 하시며, 짐작보다 다정한 확인을 통해 오해를 이해로 바꾸어 가는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오늘은 내 마음대로 상대를 단정 지으려 할 때 한 자락 멈추어 서서, 상대의 진짜 사연에 귀를 기울이는 정직하고 지혜로운 하루를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