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디모데후서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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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한국과 일본의 전통 목수가 나무의 거친 표면을 반듯하게 깎기 위해 같은 나무 앞에 섰다고 생각해 보자. 한국 목수는 대패의 가로 손잡이를 잡고 몸의 무게를 앞으로 실어 대패를 밀어낸다. 반면 일본 목수는 앞뒤로 벌린 양 발의 균형을 생각하고 힘조절을 하며 대패를 몸 쪽으로 천천히 당긴다. 한 사람은 밖으로 밀고, 다른 사람은 안으로 당긴다. 두 사람이 서로의 모습을 처음 본다면 이상하게 느낄 수 있다. 한국 목수는 “앞으로 밀면 될 것을 왜 굳이 뒤로 당기지?”라며 의아해하고, 일본 목수는 “몸쪽으로 당기면 섬세하게 조절할 수 있는데 왜 힘껏 밀어내지?”라며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한쪽만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두 방식 모두 오랜 세월 동안 궁궐과 사찰, 집과 가구를 만들었고, 비바람을 견디는 건축물을 세운 도구와 방식이다. 도구의 차이는 발전의 우열에서 비롯되지 않고, 다루어야 했던 목재의 성질, 건축물의 구조, 작업 환경과 자세, 철을 다루는 기술, 장인 전수 방식 및 도구 유통 시장 등 역사적 물리적 배경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한국의 전통 대목(집·궁궐·사찰처럼 큰 건축물의 뼈대를 만드는 목공 분야)은 굵고 불규칙하게 휜 자연목을 현장에서 직접 살피며 건축에 맞추어야 했다. 기둥마다 굵기와 휨이 달랐기에, 목수는 눈앞의 놓인 나무의 결을 읽고 그에 맞는 선을 그어야 했다. 때로는 기둥의 곡선에 맞추어 T자 모양의 자를 현장에서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이미 만들어진 규격 도구에 나무를 억지로 맞추지 않고, 눈앞에 놓인 나무의 모양을 살핀 뒤 그 나무에 맞는 도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 안에는 “모든 나무가 똑같지 않으므로, 하나의 방법만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라는 현장 중심의 유연한 지혜가 담겨 있다. 일본의 목수들은 ㄱ자 모양의 금속 자인 곡척(사시가네)과 먹통, 그리고 여러 종류의 톱과 대패를 사용하여 작업을 세밀하게 나누었다. 나무의 결을 따라 자르는 톱과 가로질러 자르는 톱이 달랐고, 거친 면을 깎는 대패, 표면을 다듬는 대패, 홈의 바닥을 깎는 대패, 모서리를 다듬는 대패가 각각 따로 존재했다. 일본 목수에게 뛰어난 기술이란 하나의 도구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의 성격을 정확히 구분하여 가장 적합한 도구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 안에는 “비슷해 보이는 일도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다르므로, 각 작업에 맞는 도구와 방법이 필요하다” 라는 절제와 정밀함의 지혜가 담겨 있다. 이처럼 한국의 도구문화는 현장의 상황에 맞추어 도구를 변형하고 발전시키는 적응력을 길렀고, 일본의 도구문화는 작업을 세밀하게 나누고 오랜 훈련을 통해 그에 맞는 도구와 절차에 몸을 맞추는 완성도를 길렀다. 물론 한국에도 정교한 전용 도구가 있었고 일본 장인도 현장에서 도구를 만들어 썼듯 이는 절대적인 이분법은 아니다. 그럼에도 두 문화는 ‘상황에 대한 유연한 적응’과 ‘절차와 동작의 정밀한 완숙’이라는 서로 다른 가치를 깊이 있게 발전시켰다.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을 유일한 정답으로 믿기 시작하면 타인의 방식은 틀린 답으로 보인다. 평생 미는 대패를 사용한 사람에게는 당기는 사람이 비효율적으로 보이고, 평생 당기는 대패를 사용한 사람에게는 미는 사람이 거칠게 보인다. 상대의 방식이 이상해 보이는 이유는 그 행동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방식이 형성된 환경과 역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도 이와 동일한 오해가 반복된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밖으로 밀어내듯'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상대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먼저 다가가 이유를 묻고, 해결책을 찾으며, 음식을 챙겨 찾아간다. 그들에게 기다림은 무관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반면 어떤 사람은 사랑을 '몸쪽으로 당기듯' 조심스럽게 표현한다. 상대가 먼저 말하지 않은 사적인 영역은 묻지 않고, 도움을 강요하지 않으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거리를 두고 기다린다. 그들에게 지나친 다가감은 사랑이 아니라 부담스러운 간섭으로 느껴진다. 우리는 마음의 본질보다 상대가 사용하는 '표현의 도구'를 먼저 평가하고 비판한다. “사랑한다면 왜 먼저 연락하지 않지?”, “걱정한다면 왜 이렇게 사적인 일까지 묻지?”라며 자신의 익숙한 기준으로 상대의 진심을 단정 짓는다. 그러나 대패질의 방향만으로 목수의 숙련도를 판단할 수 없듯, 표현 방식만으로 사랑의 깊이를 판단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밀었는가 당겼는가가 아니라 거친 나무가 제대로 다듬어졌는가이며, 많은 말을 했는가 침묵했는가가 아니라 그 행동을 통해 상처 입은 사람이 실제로 위로와 회복을 얻었는가이다. 한국의 도구문화는 상대의 필요를 생각하며 다가가는 지혜를 가르쳐 준다. 휘어지고 굵은 기둥에 반듯한 자를 억지로 대면 정확한 선을 그을 수 없다. 먼저 기둥의 모양을 살피고 그 기둥에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먼저 찾아가 주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혼자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사람도 있다. 구체적인 도움을 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판단 없이 들어줄 존재를 찾는 사람도 있다. 내게 효과적이었던 방법을 타인에게 그대로 적용하기보다, 상대의 형편을 먼저 살피고 그에게 필요한 도구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일본의 도구문화는 작업의 성격을 분별하여 알맞은 도구를 선택하여 쓰는 지혜를 가르쳐 준다.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충고의 도구를 꺼내거나, 들어주어야 할 때 가르치는 도구를 쓰면 안 된다. 용서를 구해야 할 때 변명의 도구를 사용하거나, 기다려야 할 때 재촉의 도구를 사용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품었더라도 잘못된 도구를 사용하면 나무를 다듬어야 할 때 망치를 휘두르는 것과 같아서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된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고정된 틀에 끼워 맞추지 않으셨다. 길가에서 부르짖는 맹인 앞에서는 걸음을 멈추셨고, 격리된 나병환자에게는 직접 손을 대셨으며, 수가성 여인에게는 인격적인 질문으로 마음속 갈증을 드러내게 하셨다. 실패한 베드로를 찾으셨을 때도 책망 대신 따뜻한 아침 식탁을 차려 주셨다. 각 사람의 형편과 상처와 믿음에 맞춰 다가가시되, 그들을 정죄하거나 지배하지 않고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나게 하셨다. 좋은 목수는 도구를 자랑하기 위해 나무를 깎지 않는다. 도구는 나무를 바르게 다듬고 건물을 세우기 위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지식과 경험과 신앙도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세우고, 상처를 회복하며, 공동체를 든든하게 만드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일본에서는 명공이 만든 대패와 끌을 박물관에 보존하며 그 자체를 예술품으로 감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도구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장식에만 있지 않고, 대패가 나무를 깨끗이 깎아내고, 톱이 나무를 바르게 자르며 끌이 정확히 다듬을 때 드러난다. 지식과 말, 신앙 경험 역시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무기가 아니라 연약한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단단하게 세우는 도구가 될 때 가치가 있다. 우리에게는 “나는 언제나 이렇게 해왔다”라는 고집을 내려놓고 상대의 상황에 맞춰 사랑의 방식을 바꾸는 한국적 적응력이 필요하다. 동시에 좋은 의도만으로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고 지금 필요한 말과 행동이 무엇인지 세심하게 구분하는 일본적 절제와 정밀함이 필요하다. 한국적 적응력만 남으면 감정적인 간섭이 되기 쉽고, 일본적 정밀함만 남으면 절차 뒤에 숨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기 쉽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 두 지혜를 완성한다. 상대의 형편에 맞춰 다가가되 사랑의 목적을 잃지 않고, 조심스럽게 기다리되 방관하지 않는다. 낙심한 이에게는 힘을 실어주기 위해 밀어주고, 멀어진 이에게는 따뜻한 품으로 끌어당기며, 우리 안의 교만과 날카로운 말은 말씀으로 깎아낸다. 같은 나무를 앞에 두고 한 목수는 밀고 다른 목수는 당긴다. 방향은 다르지만 두 사람의 목적은 같다. 좋은 도구는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지 않는다. 도구가 장인의 손 안에서 합당하게 쓰이듯, 우리도 하나님의 손에 들린 좋은 도구가 되어야 한다. 내 뜻대로 사람을 바꾸려는 무기가 아니라 상처를 회복시키고 연약한 삶을 이어주는 성숙하고 아름다운 도구로 살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오늘의 실천
“하나님, 내게 익숙한 표현 방식만을 유일한 정답이라 고집하며, 타인의 형편과 마음의 결을 깊이 살피지 못했던 지나온 태도를 회개합니다. 나의 좋은 의도만을 내세워 상대의 영역을 침범하고 성급하게 다가감으로 상처를 주었거나, 반대로 배려라는 핑계 뒤에 숨어 고통받는 이웃을 차갑게 방관했던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소서. 사람의 형편을 먼저 읽는 지혜와, 각 사람에게 필요한 사랑의 도구를 바르게 선택할 수 있는 절제를 허락하여 주소서. 낙심하여 멈춰 선 이에게는 다정하게 밀어주는 용기를 더하게 하시고, 외로이 멀어져 가는 이에게는 따뜻하게 당겨 품어주는 은혜를 더하여 주소서. 위로가 필요한 이에게 함부로 충고의 무기를 휘두르지 않게 하시고, 조용한 기다림이 필요한 이에게 나의 조급함을 강요하지 않게 하소서. 내 뜻과 경험을 증명하려는 날카로운 도구가 아니라, 상처 입은 이들의 거친 마음을 부드럽게 다듬고 사람을 온전히 세워가는 주님의 손에 잡힌 거룩하고 유용한 도구가 되게 하소서.” 오늘은 만나는 이들의 사정과 마음의 결을 먼저 살피며, 내게 익숙한 도구와 방법을 내려놓고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도구를 신중하게 선택하여 섬기는, 따뜻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