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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7월 16일 묵상

오늘의 말씀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로마서 12:4-5)"

오늘의 묵상

오늘은 숟가락의 조화와 젓가락의 거리에 대해 생각해보자. 한국이나 일본의 식탁에 올라오는 도구 중에는 숟가락과 젓가락이 있다. 둘 다 음식을 먹는데 사용하지만 자세히 보면 서로의 기능은 전혀 다르다. 식사시에 숟가락의 용도는 다양하다. 밥도 뜨고, 국도 뜨며, 여러 재료를 한꺼번에 섞거나 모아서 입으로 가져간다. 반면 젓가락의 용도는 섬세하다. 많은 음식 가운데 원하는 것만 골라 집고, 얽힌 것을 풀고, 큰 것을 작게 나누고, 생선가시와 같이 먹을 수 없는 것을 발라낸다. 숟가락이 ‘모으는 일’에 능하다면, 젓가락은 ‘구별하는 일’에 능하다. 한국 식탁에서는 모양도 성질도 다른 이 둘을 합쳐 한 벌인 ‘수저’라고 부른다. 각자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도구가 한 끼의 식사를 완성하기 때문에 ‘벌’이라고 한다. 흔히 우리는 나와 생각과 취향이 같아야 좋은 관계라고 생각하기 쉽다. 음식의 호 불호가 같고, 정치적 견해나 성향이 같아야 하며, 느낌이나 감정표현의 방식이 같아야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숟가락과 젓가락이 한 벌로 함께 사용되는 이유는 서로가 닮았기 때문이 아니다. 서로 전혀 다르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밥은 숟가락으로 먹지만 반찬을 먹을 때는 사용하지 않는다. 숟가락은 생선가시를 발라내거나 반찬을 집을 경우에는 매우 불편하다. 젓가락도 마찬가지다. 젓가락만으로도 거의 모든 음식을 먹을 수는 있지만 국물을 떠먹거나 비빔밥같이 골고루 섞어 먹는 음식에는 한계가 있다. 오늘날의 사회는 각 개인들에게 한 가지만이 아니라 여러가지를 잘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경향이 많다. 말을 잘하는 사람에게 듣는 일까지 완벽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신중한 사람에게 신속한 결단력까지 요구하며, 감정이 풍부한 사람에게 엄청난 냉철함을 요구하고, 조용한 사람에게 사람들 앞에서 자신 있게 자신을 드러내라고 요구한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의 모든 면을 내가 좋아하거나 나와 같은 모양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그 장점이 나와 너라는 우리 안에서 제대로 사용되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비빔밥이 상에 나올 때의 모습을 생각해보자. 초록색 시금치, 갈색 고사리, 흰자와 노른자의 달걀, 그리고 고기와 고추장이 각각 자기 자리에 예쁘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비빔밥을 먹기 위해서는 그 예쁘고 아름다운 배열을 모두 부수듯 숟가락으로 비벼야만 한다. 비빔밥을 처음 접한 외국인이 비빔밥을 먹는 모습에 황당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름다우리 만큼 예쁘게 담아 놓고는 왜 굳이 모양을 깨뜨리는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빔밥의 가치는 예쁜 배열을 보존하는 데 있지 않다. 각각의 재료들이 서로 어우러지고 합쳐져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내는 데 있다. 분명 고사리는 고사리로 남아 있고 콩나물은 콩나물로 남아 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자기 맛 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고추장의 맛이 쌀알과 나물에 스며들고, 참기름의 향이 그릇 안을 오가며, 달걀노른자의 부드러움이 매운맛을 감싼다. 비빔밥에서 조화란 서로 만나 부딪치며, 영향을 주고받아 전체가 변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도 이런 조화가 필요하다. 가족이 서로 속마음을 터놓고 말하지 않고, 같은 직장에서 일하면서도 자기 업무만 중요시하고, 같은 교회에 다니면서도 서로의 아픔을 알지 못한다면 겉으로는 단정하게 배열되어 있어 보여도 아직 비벼지지 않은 상태의 비빔밥과 같다. 관계는 서로가 아름다운 모습일지라도 가만히 있어서는 저절로 깊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불편한 감정을 나누며, 서로 섞여 상대의 기쁨과 아픔이 내 삶에 들어오도록 허락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단정한 모양이 흐트러질 수도 있다. 내가 세워 놓은 계획이 바뀌고, 내 시간과 돈을 나누어야 하며, 상대방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질 수도 있다. 그렇다. 사랑도 언제나 깔끔하지는 않다. 진심으로 상대의 고통을 받아들이면 내 마음도 불편해질 수 있고, 상대의 짐을 함께 지면 내 어깨도 무거워진다. 그러나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 혼자서는 만들 수 없었던 깊은 맛을 우리 모두 경험할 수 있다. 한편 일본의 돈부리(덮밥)는 비빔밥과 다른 방식으로 조화를 이룬다. 돈부리는 밥을 먼저 아래에 넣고, 고기나 생선, 튀김, 달걀 같은 주재료는 그 위에 놓이며, 소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며 스며들게 만든다. 그러나 먹을 때 비빔밥과 같이 전체를 완전히 뒤섞지는 않는다. 젓가락으로 토핑과 밥의 양을 먹는 사람이 자기 입의 크기를 생각하여 적당히 맞추어 조절한다. 물론 첫 입에는 토핑이 많고, 두번째 입에는 밥이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완전히 섞어 미리 같은 맛으로 만들지 않고, 먹는 순간마다 관계를 맞추며 맛있게 먹는 묘미가 있다. 가까워야 한다고 해서 모든 경계를 무너뜨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상대의 모든 일에 관여할 권리를 얻는 것도 아니다. 비빔밥의 조화가 서로 섞이며 변화하는 조화라면, 돈부리의 조화는 서로의 위치와 모양을 존중하면서도 오묘하게 연결하는 조화다. 우리에게는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 어떤 순간에는 흩어진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서로의 사정을 함께 섞으며, “당신의 문제는 당신만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는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되는 영역을 분별하고, 상대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기다리며, 도움이라는 구실로 그의 삶에 필요이상으로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종종 사랑과 간섭을 혼동한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야”라고 말하면서 상대의 선택을 빼앗고, “우리는 가족이잖아”라고 말하면서 사생활의 경계를 아무렇지 않게 넘으며, “다 잘되라고 하는 일이야”라고 말하면서 자기 방식을 관철시키려 한다. 이것은 숟가락으로 모든 것을 마구 비비는 것과 같다. 사실 모두를 함께 비벼야 재 맛인 비빔밥도 재료의 양과 상태를 무시하거나 각각의 심하게 섞으면 좋은 맛이 덜해진다. 잘 비빈다는 것은 다른 재료를 흔적도 없이 내 재료와 같아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재료가 서로 어우러져 각 재료의 맛과 식감을 남기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존중과 무관심도 혼동하기 쉽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향해 “그 사람의 인생이니 알아서 하겠지”라고 말하며 실상은 외면하고, “선을 넘고 싶지 않다”는 핑계로 따뜻한 말 한마디조차 건네지 않으며, “각자 자기 일을 하면 된다”고 말하며 공동체의 아픔에서 도망친다. 이것은 내 그릇만 생각하며 옆 사람의 빈 그릇을 보지 않는 것과 같다. 경계선이 사람을 무시하거나 버리기 위해 세우는 담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상대를 한 사람으로 존중하면서도 계속 사랑하기 위해 유지해야 하는 거리가 되어야 한다. 좋은 관계는 늘 붙어 있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필요에 따라 가까이 가야 할 때 가까이 가고, 물러나야 할 순간에는 물러날 수 있어야 한다. 두 짝이 너무 벌어진 젓가락은 음식을 잘 집을 수 없으며, 완전히 붙어 있어도 음식을 집을 수가 없다. 사람 사이에도 적절한 거리가 필요하다. 너무 멀면 외로워질 수가 있고, 너무 가까우면 숨이 막힐 수도 있다. 너무 무관심하면 관계가 메마를 수도 있고, 너무 간섭하면 상대의 자유를 박탈할 수도 있다. 지혜로운 사랑은 언제 비벼야 하고 언제 구별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며, 언제 숟가락처럼 섞어야 하고, 언제 젓가락처럼 나누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의 몸이지만 여러가지 지체로 이루어졌으며, 그 지체들이 모두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몸이 건강한 이유는 모든 지체가 똑같이 생겨서가 아니라, 눈은 보는 기능, 귀는 듣는 기능, 손발은 잡고 이동하는 기능을 제 대로 하기 때문이다. 각 지체가 서로 다르면서도 다른 지체를 무시하지 않고 인정하며 조화를 이룰 때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다. 눈이 손에게 “너는 왜 보지 못하느냐”고 비난하고, 발이 귀에게 “너는 왜 걷지 못하느냐”고 무시하며 그렇게 할 것을 요구하여 자기 뜻을 관찰시킨다면 몸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타인을 자기 위주로 평가하기 쉽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신중한 사람을 답답하게 생각하고, 신중한 사람은 성급한 사람을 경솔하다고 생각한다. 감성이 풍부한 사람은 논리적인 사람을 차갑다고 여기고, 논리 정연한 사람은 감정을 쉽게 드러내는 사람을 가벼운 사람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 차이는 결함이 아니라 어쩌면 공동체에 필요한 또 다른 필요일 수 있다. 숟가락은 젓가락보다 낫지 않고, 젓가락도 숟가락보다 우월하지 않다. 비빔밥과 돈부리 역시 어느 한쪽이 더 성숙한 식 문화를 뜻하지도 않는다. 비빔밥은 우리에게 서로 섞이는 용기를 가르쳐 주고, 돈부리는 서로의 자리를 존중하는 절제를 가르쳐 준다. 숟가락은 넓게 받아들이는 마음을 보여주고, 젓가락은 세심하게 구별하는 지혜를 보여준다. 인생은 이 두 가지 사이에서 균형을 배우는 과정인지 모른다. 마음을 열지 않고 혼자를 고집하는 사람에게는 숟가락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이 그의 삶에 조금은 섞이도록 허락해야 한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삶에 과도하게 개입하고 책임지려는 사람에게는 젓가락이 필요하다. 사랑하되 상대의 몫까지 빼앗지 않고, 도우면서도 그의 선택권을 존중하며 남겨 두어야 한다. 예수님은 사람들과 섞여 사셨다. 병든 사람을 만지고,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던 사람과 식사하며, 슬퍼하는 사람 곁에서 함께 우셨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의 요구에 끌려 다니지는 않으셨다. 혼자 기도할 시간을 찾아 기도하셨고, 군중이 원하는 방향이 하나님의 뜻과 다를 때는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예수님의 사랑은 경계선이 없는 의존이 아니었고, 차가운 거리 두기도 아니었다. 다가가야 할 때는 바짝 다가가셨고, 물러서야 할 때는 철저히 물러서며, 각 사람을 품되 그 사람의 고유한 인격을 절대로 무시하지 않는 사랑이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 지혜가 필요하다. 누군가를 내 방식으로 바꾸려 하지 말고 그의 고유한 방식을 인정해야 한다. 사랑은 상대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더 훌륭한 사람으로 변화해 가는 데서 완성된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평범한 숟가락과 젓가락이라는 도구가 조용히 말한다. 모으고 섞어야 할 때는 잘 모으고 골고루 섞으며, 구별해야 할 때는 철저하게 잘 구별하고, 가까이 가야 할 때는 바짝 가고 거리를 두어야 할 때는 시야 안에 있되 멀리 서라고 말한다. 나와 다른 모습의 상대가 틀린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기억하라고 한다. 좋은 공동체란 모두가 같은 맛을 내는 모임이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기 다움을 잃지 않고서도, 혼자로는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는 더 깊고 오묘한 맛을 함께 만들어 가는 모임이다.

오늘의 실천

“하나님, 제가 타인의 영역을 존중한다는 핑계로 고립된 이웃을 외면하는 차가움 뒤에 숨지 않게 하시고, 반대로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내 생각과 속도만을 강요하며 상대방을 숨 막히게 하지 않게 하소서. 내 안의 조급함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감정을 쏟아내거나 상대를 쉽게 판단하고 싶을 때는 잠시 멈추어 서서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묻는 ‘조심스러운 더딤’을 배우게 하소서. 반면 낙심한 이에게 따뜻한 관심을 표현하고 잘못을 고백하며 배려를 실천하는 일에는 계산 없이 ‘신속하게’ 행동하게 하소서. 가까이 다가가되 강제하지 않고, 거리를 지키되 외면하지 않는 균형 잡힌 시선을 갖게 하소서.” 오늘은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먼저 귀를 열고, 내 입술과 마음은 한 걸음 멈추어 다정하게 움직임으로써, 존중과 사랑이 공존하는 안전하고 따뜻한 하루를 만들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