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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24일 묵상

오늘의 말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고린도후서 5:14a)"

오늘의 묵상

앙리 베르그송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제3장 「역동적 종교」에서 종교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깊고 고차원적인 원천을 밝힌다. 그가 말하는 역동적 종교는 인간을 익숙한 제자리에 안주하게 만드는 종교가 아니다. 단순히 내면의 두려움을 달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어적 수준을 넘어, 인간을 다시 사랑의 자리로 움직이게 만드는 강력한 영적 에너지다. 정태적 종교가 인간이 절망하여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안전한 울타리'라면, 역동적 종교는 문도 없는 울타리에 출구를 내어 세상 밖으로 뛰어들게 만드는 생명의 동력이다. 인간은 상처받거나 두려움을 느낄 때 본능적으로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근다. 실패하지 않으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낯선 타인을 멀리하며 오직 나와 내 집단의 안위만을 구하는 것은 지극히 실존적인 방어기제다. 마음이 무너지고 영혼이 고갈되었을 때는 잠시 피난처에 숨어 보호받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보호받는 상태 자체가 삶의 최종 목적지가 될 때 마음은 급격하게 좁아진다. 내 상처와 내 울타리만 바라보는 신앙은 결국 작은 원 안에서만 맴도는 닫힌 운동에 그치고 만다. 바울이 고백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는 선언은 바로 이 닫힌 원을 깨뜨리는 힘이다. 여기서 강권이란 외부의 강요나 의무가 아니라, 내면에서 솟구치는 사랑에 압도되어 도저히 움직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영적인 이끌림을 뜻한다. 베르그송은 역동적 종교의 중심에 '신비주의'가 있다고 보았다. 단, 그가 말하는 신비주의는 현실을 도피해 황홀경에 빠지거나 초자연적인 체험에만 머무는 일탈이 아니다. 그에게 '완전한 신비주의'는 깊은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의 힘에 붙들려 고통스러운 현실의 한복판으로 다시 뛰어드는 위대한 행동이다.

* 소극적 신비주의: 눈을 감고 나만의 평안과 영적 위안을 누리는 단계 * 완전한 신비주의: 다시 눈을 부릅뜨고 세상의 고통받는 이웃을 바라보며 움직이는 단계

참된 사랑은 닫힌 성문 앞에 오래 서 있지 못한다. 누군가의 아픔을 목격했을 때 외면하지 못하고 기어이 그 곁으로 다가가게 만드는 역동성이야말로 진짜 신앙의 증거다. 우리의 신앙도 때로 아무런 행동 없이 정지하곤 한다.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기도의 자리를 지키지만 정작 사람을 향한 긍휼과 마음의 크기는 점점 약해지고 좁아질 수 있다. 종교가 습관이 되어 나만을 보호하는 단단한 껍질이 될 때 생명의 흐름은 멈춘다. 그럴 때 신앙은 우리를 살리는 힘이 아니라, 익숙한 자리 안에 머물게 하는 도구가 된다. 베르그송의 역동적 종교는 “나는 신앙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는가, 아니면 사랑을 따라 나아가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께 위로만 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위로 받은 사람으로 누군가를 위로하려 하고 있는가. 나는 내 불안이 잠잠해지기만 바라는가, 아니면 불안 속에서도 사랑의 길을 선택하려 하는가”라고 묻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를 결코 책망하지 않고 먼저 따뜻하게 품어 주신다. 지친 사람에게 다시 일어나라고 다그치기보다, 먼저 숨을 쉬게 한다. 그러나 우리를 보호막 속에 영원히 가두어 두지는 않으신다. 충분히 위로 받고 붙들린 영혼은 이제 자기를 넘어 '열린 사회'를 향해 도약해야 한다. 역동적 종교는 바로 그 움직임이다. 보호받은 마음이 닫힌 마음으로 굳어지지 않고, 다시 열리는 것이다. 위로 받은 사람이 자기 위로에만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의 눈물을 알아보는 것이다. 사랑받은 사람이 그 사랑을 자기 안에만 가두지 않고, 누군가에게 흘려보내는 것이다. 그때 신앙은 정지된 습관이 아니라 살아 있는 길이 된다. 내 편, 내 공동체의 좁은 소속감을 깨고 울타리 너머의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자가 바로 오늘날의 작은 신비가다. 누군가를 용서하기 어려운 자리에서 조금 더 부드러운 마음을 구하는 것, 낯선 사람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 것, 내 편이 아닌 사람에게도 인간다운 존중을 잃지 않는 것이 곧 닫힌 삶을 흔드는 역동적 사랑의 시작이다. 열린 사랑은 거창한 말에서 시작되지 않을 수 있다. 오늘 한 사람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늘 피하던 사람을 위해 조용히 기도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내가 옳다는 생각만 내려놓고, 상대의 아픔을 조금 들어 보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작은 사랑의 행동도 닫힌 삶을 흔드는 시작이 될 수 있다. 베르그송은 역동적 종교가 열린 사회를 향한다고 보았다. 열린 사회는 모든 제도가 완벽한 사회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이 자기 울타리 안에만 갇히지 않는 방향이다. 내 가족, 내 공동체, 내 편만이 아니라, 더 넓은 사람들을 향해 마음이 열리는 삶이다. 그곳에서 사랑은 더 이상 좁은 소속감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그런 방향으로 조금씩 움직이면 좋겠다. 두려움에서 시작했더라도 사랑으로 나아가면 좋겠다. 위로 받기 위해 기도했더라도, 위로하는 사람으로 자라가면 좋겠다. 보호받기 위해 하나님을 찾았더라도, 보호받은 마음으로 누군가를 품게 되면 좋겠다. 그것이 닫힌 종교에서 역동적 종교로 나아가는 길이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닫히고 싶고, 피하고 싶고, 나만 생각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를 조용히 부른다. 더 넓게 보라고, 조금 더 따뜻하게 말하라고, 다시 한 걸음 나아가라고 부른다. 그 사랑의 부름이 우리를 살게 한다.

오늘의 실천

“하나님, 제 신앙이 두려움을 달래는 데서만 멈추지 않게 하소서. 현실이 불안할 때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하게 하시되, 그 피난처 안에만 숨어 있지 않게 하소서. 주님께 위로 받은 마음이 다시 누군가를 향한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시고, 따뜻하게 보호받은 마음이 다른 사람을 품는 열린 마음이 되게 하소서. 제 안에 있는 완고하게 닫힌 이기적인 울타리를 보게 하소서. 내 사람만 생각하고, 내 상처만 바라보고, 내 안전만 붙들려는 좁은 마음을 주님 앞에 내려놓게 하소서. 저를 다그치거나 책망하지 않으시는 은혜 안에서 진정한 쉼을 얻게 하시고, 그 쉼을 동력삼아 다시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갈 용기를 주소서. 오늘 하루, 작은 사랑의 행동 하나를 선택하게 하소서. 가까운 이들에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을 건네고, 외면하고 싶었던 사람의 사정을 조용히 헤아리며, 제 마음의 문을 아주 조금이라도 열게 하소서.” 오늘은 두려움의 울타리 안에만 머물지 않고, 위로 받은 마음으로 사랑의 문을 조금 열고, 받은 은혜를 작은 행동으로 흘려보내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