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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4일 묵상

오늘의 말씀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시편 139:1-2

오늘의 묵상

앙리 베르그송은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한글번역이 아닌 Kindle Edition 意識に直接与えられているものについての試論을 읽고 쓴 글)』의 1장 「심리상태들의 강도에 관하여」에서 인간의 내면세계를 물리적인 숫자나 양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기쁨이 커졌다", "슬픔이 깊어졌다", "분노가 강해졌다", "고통이 심해졌다"라고 표현하며, 마치 감정을 컵에 붓는 물의 양처럼 증감이 가능한 것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슬픔이 깊어진다는 것은 슬픔의 양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의식 전체의 색채와 밀도가 전혀 다르게 변화하는 '질적인 전환'이라고 한다. 기쁨이 커진다는 것 역시 기쁨의 양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의 분위기가 새롭게 변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말이나 표정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누군가 조용히 앉아 있다고 해서 내면까지 평안한 것은 아니며, 웃고 있다고 해서 아픔이 없는 것도 아니다. "괜찮다"라고 담담히 말하는 사람도 깊은 외로움에 빠져 있을 수 있고, 평온해 보이는 일상 밑바닥에 오래된 상처이 짙게 내재해 있을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의 감정은 단순한 크기나 강도로 측량할 수 없는, 저마다 고유한 깊이를 지난 거대한 우주와 같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 방황한다. "하찮은 말 한마디에 온 마음이 왜 맥없이 무너지는지, 과거의 상처인데 새 살이 돋지 않고 왜 아직 아픈지, 기도하는데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왜 흐르는지 알지 못해 괴로워한다. 남들이 보기에 감사할 조건이 가득한 상황인데도 마음 한편에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남아 있을 때, 우리는 "나는 왜 이렇게 믿음이 약할까. 왜 아직도 이 일을 넘어서지 못할까"라며 스스로를 책망한다. 그러나 상처와 슬픔, 기다림과 회복은 단순한 숫자나 양으로 계산되지 않는다 것을 기억해야 한다.

베르그송의 지적처럼 감정의 변화는 양적인 증감이 아니라 질적인 변화다. 아주 작은 서운함이 깊은 외로움이 되기도 하고, 순간의 두려움이 삶 전체를 흔드는 불안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벼랑 끝에서 들은 작은 위로 한마디가 영혼의 칠흑 같은 어둠을 몰아내는 찬란한 빛이 되기도 하며, 낙심 중에 드린 짧은 신음 같은 기도가 무너진 영혼을 다시 붙드는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한다. 타인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미풍처럼 보여도, 그 사람 안에서는 거대한 해일과 같은 파문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우리는 종종 기도를 몇 시간 했는지, 성경을 몇 장 읽었는지, 예배와 봉사의 횟수가 얼마나 많은지를 가지고 믿음의 크기를 판단하려 한다. 물론 이런 경건의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신앙의 외적인 부피나 수량에 주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단 일분을 기도하더라도 그 안에 깃들인 간절함을 보시며, 단 한 구절의 말씀을 묵상하더라도 그 앞에 엎드린 영혼의 진실함을 보신다. 긴 시간을 미사여구로 채운 기도 속에도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없을 수 있고, 평생의 종교적 행위 속에도 사랑이 결여될 수 있음을 아시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을 양이 아닌 오직 '질'로 판단하신다.

이 사실은 힘든 세상에서 지쳐 있는 우리에게 가슴 벅찬 위로가 된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침묵을 차가움으로 오해하고, 우리의 눈물을 과장된 감정의 산물로 치부하며, 우리의 더디고 느린 회복을 믿음이 없는 증거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왜 그렇게 아파하는지, 무너지지 않으려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처절하게 애쓰는지, 과거의 상처가 왜 아직도 시린지를 그대로 알아주신다.

다윗은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앉고 일어섬을 아실 뿐만 아니라, 아득히 멀리서도 우리의 복잡한 생각을 밝히 아신다. 말로는 도저히 설명하지 못하는 마음도 아시고, 남 몰래 삼킨 눈물의 의미도 아시며, 채 정리하지 않은 뒤엉킨 감정의 타래까지도 모두 아신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마음을 그럴듯하게 포장할 필요가 전혀없다. 억지로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되며, 믿음 좋은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아시고, 측량할 수 없이 큰 사랑으로 우리를 품어 주시기 때문이다.

슬프면 울어도 좋고, 버거우면 힘들다고 고백하며, 두려움이 엄습할 때 그 떨리는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도 괜찮다. 참된 믿음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억지로 부정하거나 억누르는 금욕이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 그대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는 용기다. 다윗도 하나님 앞에서 춤추고 기뻐했고, 통곡하며 울었으며, 두려워 탄식하다가도 소망을 붙들었다. 하나님은 그런 다윗의 요동치는 마음을 단 한 번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윗의 중심을 보시며 친밀하게 그리고 깊이 만나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 내면에 슬픔이 남아 있다고 해서 스스로를 믿음 없는 자로 낙인 찍어서는 안된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고 영적으로 연약한 자라 자책할 필요도 없으며, 마음이 회복이 더디다고 해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절망할 이유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아직도 그 모양이냐"라고 다그치거나 몰아붙이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깊은 곳을 누구보다 잘 아시기에, 우리 영혼이 다치지 않도록 가장 완벽하고 섬세한 은혜의 방식으로 우리를 만지신다.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 안의 슬픔의 양을 줄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망으로 캄캄해진 마음에 작은 소망의 빛을 비추시어 분위기를 바꾸시는 생명의 역사다. 두려움으로 움츠러든 심령에 "내가 너와 함께한다"며 용기를 주시며, 상처로 굳어진 마음에 보혈의 강물을 흘려보내 다시 사랑할 수 있는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어 주신다. 그래서 은혜는 감정을 억누르는 규율이 아니라, 마음을 근본적으로 새롭게 하는 성령의 능력이다.

사람은 우리 마음의 크기를 겉으로 보이는 언행으로 짐작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깊이와 넓이를 너무 정확하게 아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과 기도, 고독과 기다림을 아시며, 우리 영혼이 회복되는데 필요한 시간과 여정을 아신다. 뿐만 아니라 그 광야 같은 황량함 속에 우리를 결코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

우리의 마음이 엉키고 복잡해서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해도 괜찮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의 깊은 침묵과 한숨을 들으신다. 무너진 마음으로 드리는 "주님, 도와주세요"라는 짧은 기도에도 귀를 기울이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 마음을 숨기지 말아야 한다. 슬픔과 두려움과 감사와 소망을 모두 주님께 가져가야 한다. 위로의 하나님은 우리를 크기나 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품으신다. 그 은혜 안에서 우리의 지친 마음은 다시 숨을 쉬고, 상처 입은 영혼은 조금씩 회복되며, 오늘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오늘의 실천

"하나님, 제 마음속에 아직 남아 있는 슬픔과 두려움 때문에 저 스스로가 자신을 정죄하거나 자책하지 않게 하소서, 보이지 않는 제 마음의 깊은 곳까지 아시는 주님 앞에, 아무 가식 없이 정직하게 나아가게 하소서. 사람들에게 미처 다 설명하지 못하는 아픔과 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한 감정까지 주님께 맡겨 드립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가운데 주님을 바라보며 흘리는 눈물을 아시는 주님을 더욱 신뢰하게 하시고, 수그러들던 소망이 주님의 따스한 위로 안에서 다시 불일 듯 일어나게 하소서. 스스로를 옭아매던 정죄의 사슬에서 벗어나, 오직 주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으로 오늘이라는 귀한 하루를 담대히 살아가게 하소서." 오늘은, 나의 모든 형편과 감정의 깊이를 이미 아시는 하나님 앞에, 숨김없는 솔직함과 간절함으로 나아가 보이지 않는 눈물을 씻어 주시고 마음의 색깔을 소망으로 바꾸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